바울의 편지들/고린도전서 연구

고린도전서 12:1~12:31

파다고기 2016. 2. 12. 19:09

여백


고린도전서 12:1~12:31


  지금까지의 내용을 정리해보겠습니다. 바울은 8장에 들어와서 예배와 관련된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먼저는 그리스도인이 이교의 그림자를 숭배하는 자리에 참석하지 말 것을 말했고, 에클레시아와 관련된 세 가지 이슈들, 1) 남성성과 여성성을 분명히 할 것 2) 성찬의 의미 3) 방언 을 살펴봅니다. 그리고 '3) 방언'에 해당하는 내용이 12~14장에 걸쳐 길게 이어집니다.

  이 장들을 읽으면서 주의해야 할 것은, 방언이 고린도 에클레시아가 찢기는 이유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바울은 방언을 금지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릇된 지혜'를 추구하는 것이 고린도 에클레시아의 문제였고, 방언 문제를 언급하는 것은 이 지혜의 문제를 바로 잡기 위함입니다. 다음의 문장을 천천히 읽으며 지나온 내용들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ㄱ) 고린도 에클레시아 사람들은 세례라는 뮈스테리온을 지나 성찬에 참여하고 있는 자신들을, ㄴ) 남녀 구별도 없는 천사와 같은 존재로 이해했고, ㄷ) 결혼한 이들은 성관계를 거부하기도 하고, ㄹ) 때로는 우상 신전을 마음대로 들락날락 거리면서도(포르네이아), ㅁ) 자신들이 살몸과는 무관한 비육체적 존재가 이미 되었다고 착각했는데, 그 근거가 바로 지혜였습니다. ㅂ) 이러한 그릇된 지혜에 대한 추구가 에클레시아를 분열시켰는데, ㅅ) 그들은 자신들의 이전 스승님들이 그러한 지혜를 가르쳐준 것으로 생각했고, ㅇ) 그러는 와중에 옳고 그림의 기준이 분명하지 않은 약한 사람들의 배려는 조금도 없었습니다. ㅈ) 심지어 성찬을 통해 부자와 가난한 자들 사이의 분열을 심화시켰습니다. ㅊ) 그리고 이 모든 이유가 자신들을 '숨에 속한 사람'이라 자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고린도 에클레시아의 상황을 보여주는 영등포 타임스퀘어 동상


  이런 상황 속에서 쟁점은, 단순히 방언을 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가 아니라, "과연 숨에 속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가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이러한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살펴봤습니다. 숨에 속한 사람은 그는 말의 설득력이 아니라 실천력으로 살아가는 사람이고, 현시대의 찌꺼기가 되면서도, 메시아 예수의 십자가 부활로 개시된 오는시대를 놓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고린도 에클레시아는 이 '숨에 속한("영적인")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쟁점을 놓고 바울과 대립했고, 바울은 이에 대한 대답으로 12~14장의 교향곡을 거쳐 그 유명한 15장의 "영의 몸"논쟁으로 결론을 내릴 것입니다.

  그 교향곡의 시작은 이러합니다.

A. 도입부 : 고린도전서 12:1~11


  숨에 속한 일들에 관하여, 내 가족들이여, 여러분들이 모르길 원치 않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방인이었을 때, 소리도 못내는 그림자들을 좇으며, 그것이 끄는대로 이리저리 끌려다녔던 (여러분들의) 과거를 말입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것을 여러분에게 깨닫게 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숨결로 말하는 사람은 누구도 "예수는 저주 받으라"라고 할 수 없고, 또 "주 예수"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거룩한 숨결로가 아니라면 할 수 없는 말입니다.


  "숨에 속한 일들에 관하여"가 핵심 쟁점입니다. 이 말을 놓치면 안됩니다. 이 말을 카리스마에 국한 된 것으로 이해해선 곤란합니다. 오늘 서두에서 보았듯, 저 말은 '숨에 속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논하기 위해 꺼낸 말입니다. 이제 고린도 에클레시아 문제의 본질을 파헤치기 위한 말입니다.

  고린도 에클레시아 사람들은 '숨에 속한 사람'을 이방 신전에서 황홀경에 빠져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것으로 이해한 것 같습니다. 그들의 이러한 이해를 생각하면, 앞에서 바울이 앞에서 나열했던 문제들의 원인을 역으로 추적해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왜 성찬에서 사람들을 차별했는지, 왜 남성성 여성성의 구별을 지우려 했는지, 그들이 약한 사람들의 양심을 돌보지 않은 채 무엇을 추구했는지, 이방신전에 참여하면서도 떳떳했던 근거가 무엇인지, 그리고 포르네이아가 벌어졌음에도 왜 그릇된 판단을 내렸는지 말입니다.

  바울은 숨에 속한 사람임을 알 수 있는 분명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하나는 부정문으로, 하나는 긍정문으로 기술되었는데, 바로 "예수에게 저주 할 수 없다"는 점과, "예수를 주"라 고백한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숨에 속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예수에게 저주할 수 없다"는 내용이 해석에 난점이 있습니다. 지난 주 제가 제시한 해석은, 이 말이 신명기 21:22,23을 알고 있는 유대인을 염두한 말이고, 뒤에 있는 "주 예수"라는 말은 카이사르를 '주'라 고백하는 로마의 상황을 넘어선 말이라, 숨에 속한 사람이 갖는 제 3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라 했습니다.(단순히 입으로 말하면 모든 문제가 끝나는 주문이 아닌, '달라진 정체성 고백'에 대한 구절입니다.)

  또 다른 해석이 있어서 소개합니다. 고든 피라는 신학자는 "예수는 저주 받으라"라는 말이 에클레시아 밖에서 귀신의 영들에게 감동된 자들이 소리치는 외침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이 앞에 나왔던 '다이몬(귀신이라 번역되어 있습니다)'에 대한 논의와 잘 이어진다고 말합니다.

  카리스마들의 다양함이 있지만, 같은 숨결입니다. 디아코노스들의 다양함이 있지만, 같은 주입니다. 일하는 것들의 다양함이 있지만 같은 하나님이며, 그분이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것들을 일하십니다. 각자에게 숨에 속한 것의 드러남이, 유익을 위해서 주어집니다. 즉 한 사람에게는 숨님을 통해 지혜의 로고스가 주어지며, 다른 이에게는 같은 숨결을 따라 지식(깨달음)의 로고스가 주어지며,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 안에서 신실함이, 다른 이에게는 병고침의 카리스마들(사건)이 한 숨결 안에서, 다른 이에게는 '수들의 일함들(능력 행함)'이 다른 이에게는 예언이, 다른 이에게는 숨들의 분별이, 다른 이에게는 다른 민족의 말들이, 다른 이에게는 말 해석이 주어집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 안에서 일하시는 분이, 한 분, 곧 같은 숨님이시고, 그의 원하시는(결정하신) 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십니다.


  앞에서 '숨에 속한 사람'에 대해서 말했다면, 이 문단에 와서는 '그렇다면 숨님이 어떻게 드러나시는가?'에 대해 말합니다. 숨님의 드러나는 양상은 '다양함'과 '같은'의 조화라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먼저 하나님에 관해 진술합니다. 그리고 그 설명에서 뚜렷이 드러나는 것은 삼위일체입니다. 삼위일체가 교리로 정리되기도 전에 하나님을 말하는 바울의 사고 속에 이미 바탕이 되어 있습니다. "같은 숨결", "같은 주", "같은 하나님"이라는 표현들을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각각 붙어 있는 역할들도 주목할만 합니다. 먼저 숨님은 '카리스마'를 맡았습니다. '카리스마'는 '거저받은(카리스) 것(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거저받은 것들이 숨님으로 (다양하게) 드러납니다. '주'이신 예수께서는 '디아코노스' 하십니다. 이 말은 '섬김, 봉사'로 번역되는데, '디아'는 '통하여'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일(에르곤)하십니다. 즉 창조에 열심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세 위격의 한 하나님.

  그리고 숨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다양하게 드러나시고, 각 사람은 숨의 표현들로서 다양하게 존재합니다. 하나씩 살펴봅시다. 숨님은 어떤 이에게는 지혜의 로고스로 드러나십니다. 고린도 에클레시아가 그릇되게 추구하던 '지혜'라는 말을 그대로 받아서, 바울은 의미를 바꾸어 버립니다. '지혜의 로고스'에서 지혜는 경험해서 아는 것을(그리고 그 경험은 오는시대를 겪어 아는 것을 가리킬 것입니다. 1:17, 2:1~16), '로고스'는 '질서잡힌 말'을 의미합니다.
  숨님은 어떤 이에게 '지식의 로고스'로도 드러나십니다. 지식은 깨달음입니다. 경험하지 않고도 아는 것입니다.(우상에 바쳐진 고기에 대해 논하면서 바울은 이미 '지식'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지식에도 로고스가 붙었습니다. 즉 바울은 지혜든 지식이든, 그것들이 질서잡힌 말로 표현되는 것을 숨님의 드러남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황홀경에 빠져서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것을 지혜의 척도라 여기고 있는 고린도 에클레시아의 이해와 상반되는 것입니다.

  나머지 숨님 드러남에 대해서는 간략하게 설명하고 넘어가겠습니다. 병 고침의 카리스마는 복수로 쓰였으므로 병고침의 사건들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예언은 숨을 받아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전하는 것을 뜻했습니다. 무질서의 황홀경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개인적 예언에 대해서 성경은 말하지 않으며, 공동체적 예언을 가리킵니다. '숨들의 분별'은 이 예언들을 올바르게 판단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방언이 마지막에 언급되었음을 눈여겨 보시기 바랍니다. 방언을 금하는 것이 아니라, 방언을 제자리에 두는 것입니다. 방언 역시 숨님이 드러나시는 방식이지만,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하므로, 방언은 언제나 공동체 안에서는 해석과 같이 기능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방언을 가리키는 또다른 이름으로는 "천사들의 말"이 있습니다.

B. 12장의 중심 선율, 코어 근육 : 고린도전서 12:12~14

  즉 이런 것입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의 모든 지체가 여럿이어도,
한 몸이듯,

메시아 역시 그렇습니다. 즉 우리 모두는 한 숨결 안에 있는 한 몸 속으로 세례를 받았는데, 유대인이든 희랍인이든, 노예든 자유인이든, 모두가 한 숨결로 흠뻑 젖도록 마신 바 되었습니다. 실로 몸에는 지체가 하나가 아니라 여럿입니다.


  고든 피의 책에 나온대로 띄어쓰기를 해봤습니다. 흔히 교회에서 '하나됨'을 강조하는 말을 듣기는 쉽지만, 이 하나됨의 강조는 언제나 다양성의 강조와 균형을 맞춰야 합니다. 하나되되 다양해야 합니다. 하나됨 안에("몸은 하나인데~한 몸이듯") 다양성을 품고 있는("많은~여럿이어도") 문장 구조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고린도 에클레시아는 방언이라는 단편적인 기준을 가지고, 획일화된 숨 드러남을 추구했습니다. 방언도 숨이 드러나시는 방법이지만, 획일화는 에클레시아의 하나됨일 수 없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세례의 그림을 가져옵니다. 그렇다고 물 세례와 성령 세례의 순서나, 어느 한 쪽이 중요하다는 말을 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다음의 그림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그림입니다. 여러 생각이 납니다. 성경에는 몸을 씻고서 새 사람이 되는 여러 이야기가 있습니다. 실로암과 같은 거룩한 숨결 속에 들어가, 하나님 창조하신 온전한 사람(시편 8편)이 되는 사람들. 그들은 한 몸이지만, 다양합니다. 숨님은 그렇게 드러나십니다. 오히려 그 한 몸이 숨님 안에 있습니다.

  바울은 이 다양하지만 한 몸을 이룬 사람들을 말하며, '메시아 역시 그렇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라 하지 않고, '메시아'라고 언급됩니다. 물론 예수께서 메시아이시지만, 아마도 바울은 구약과의 연결성을 염두하고 있는 듯 합니다.(10:1. 12:2도 같은 강조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메시아'를 언급했을 때, 이 말은 창조로 시작되는 토라 이야기를 불러옵니다. 타락한 시대로부터 언약백성을 출애굽시키는 지도자가 메시아입니다. 그 메시아는 온전한 사람이요, 그 사람과 한 숨결로 하나된 사람들은 다양한 하나됨으로 온전합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죽음을 밟고 일어나셨듯, 이 메시아와 하나된 사람들도 죽음을 밝고 일어설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15장에서 확인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타락을 해결하는 하나님의 방법, 이스라엘입니다.

C. 숨님의 드러남은 다양하다 : 고린도전서 12:15~20


  만일 한 쪽 발이 "나는 손이 아니니, 몸으로부터 있지 않아"라고 말한들, 몸으로부터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또 만일 한 쪽 귀가 "나는 눈이 아니니, 몸으로부터 있지 않아"라고 말한들, 몸으로부터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몸 전체가 다 눈이라면, 어찌 들음이 (있겠습니까)? 몸 전체가 들음이면, 어찌 냄새맡음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 지체들을 배치하셨는데, 그들 하나 하나를 그 몸 안에, 그의 뜻 하심 따라 (하셨습니다). 만일 모든 것들이 한 (종류)의 지체였다면, 어찌 몸이 (되겠습니까)? 이제, 지체는 여럿, 몸은 하나입니다.


C'. 숨님의 드러남은 하나된다 : 고린도전서 12:21~26


  눈이 손에게 "나는 네가 필요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또 머리가 두 발에게 "나는 너희들이 필요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몸에는 더 약해 보이는 지체가 훨씬 더 짊어진 것들이 많고, 몸에서 더 불명예스럽게 여기는 지체에게 우리는 더 큰 명예를 선사합니다. 그래서 우리 중 불명예스러운 지체가 더 겉보기로는 좋아 뵙니다. 그런데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몸을 구성하셨고, 못난 부분에 더 많은 명예로움을 주셨는데, 이는 몸 안에 찢김없이, 모든 지체들이 서로를 위해 같은 것을 갈망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겪습니다. 한 지체가 뚜렷해지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


  우리가 위에 보고 있는 두 문단은 하나는 다양성을, 다른 하나는 하나됨을 강조합니다. 당시 로마의 저술가들이 정치체제를 설명하기 위해 '몸'을 가지고 비유를 드는 방식은 흔한 것이었습니다. 머리에 대한 강조, '어느 특별한 한 지체(황제)가 중요하다'는 주장을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사용을 뒤집습니다. 창조의 관점에서 몸을 생각하는 유대 사상가의 입장에서 말입니다. '어떤 지체가 특별하기 위해선, 특별하지 않은 지체들이 필요했다. 그렇다면 누가 더 특별한 것인가?' 몸을 이렇게 생각해야만, 다양성과 하나됨이 조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게다가 이 몸에 대한 이야기가 당시 비유로 사용되었지만, 유대사상가인 바울에겐 현실이요, 반드시 다가올 미래였습니다.(15장) 숨님은 다양하게 드러나시지만, 어느 하나의 드러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은 하나됨을 이뤄야 합니다. 바울은 이 균형을 지켜갑니다.

  고린도 에클레시아에게서 벌어진 '찢김'에 대해서도 언급합니다. 이 문제가 방언으로 부각되었지만, 그 문제의 본질은 방언이 아님을 말씀드렸습니다. '숨에 속한 사람은 어떠한가?'가 중요한 질문이었고, 방언 역시 숨님이 드러나시는 방식 중 하나였지만, 그 방식 자체가 다양하지 않은 것이 고린도 에클레시아의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숨님을 어느 한 방식으로 축소시켜놓는 것이 고린도 사람들이 추구하는 그릇된 지혜였습니다. 바로 이 지혜로부터 찢김이 싹 텄습니다. (그릇된 사고 방식이 그릇된 행동을 낳게되는 로마서 1:18이후의 맥락과 같습니다.) 바울이 방언보다 더 큰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놓치지 말아야 겠습니다. 방언이 문제가 아니라, 지혜에 관하여 바울을 대적하는 것에 바울은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숨님의 다양한 드러남에 대해 말한 바울은, 다음 문단부터 '다양한 지체들에 대한 관심'으로 초점을 옮겨갑니다. 한 몸 안에서 숨님이 다양하게 드러나신다면, 옆에 있는 하나님의 우주 가족들은 숨님의 다양한 표현 중 하나가 됩니다. 따라서 옆 지체에 대한 돌봄은 곧 몸 전체에 대한 돌봄이 됩니다.


D. 소결론 : '숨에 속한 한 몸'은 이러합니다,
그리고 훨씬 더 끝내주는 길의 예고 : 고린도전서 12:27~31


  그런데 여러분은 메시아의 몸이고, 지체는 개인으로부터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고린도 지역의) 에클레시아로 배치하셨는데, 먼저는 사도, 둘째로 예언자, 셋째로 가르치는 이, 다름은 '수들', 다음은 병고침의 카리스마들, 도움들, 키잡이들, 그리고 여러 민족의 말들을 두셨습니다. 모두가 사도는 아니지 않습니까? 모두가 예언자는 아닙니다. 모두가 가르치는 이는 아닙니다. 모두가 '수'를 행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두가 병고침의 카리스마들을 지닌 것은 아닙니다. 모두가 다른 민족의 말들로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두가 방언을 해석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더 큰 카리스마들을 추구하십시오! 이제 내가 여러분에게 훨씬 더 끝내주는 길을 보여주겠습니다.


  바울은 12장 서두에서 다루었던 문제로 돌아옵니다. 다양성과 하나됨의 조화를 이룬, 메시아께서 대표하시는 그 한 몸을 설명한 뒤, 다시 카리스마에 대해서 얘기해보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첫째, 둘째가 있다고 이것을 서열로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역할에 대한 논의임을 분명히 해둡니다. 다만 시간 순서상 먼저 수고했던 사람들을 앞 쪽에 배치한 것 같습니다. 사도들로부터 시작해서 여러 카리스마의 방향들로 다양성을 더해갑니다. 게다가 바울은 '사도됨'을 카리스마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도됨은 숨님의 드러남이 아니라, "메시아로부터(로마서 1:4,5)" 직접 보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어 예언자들이 등장합니다. 에클레시아 안에서 늘상 숨 받아 말하던 사람들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메시아를 예고하는 구약에 속한 마지막 예언자는 세례요한이었지만, 에클레시아 안에서는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예언들이 일상적으로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이 예언자들로 불렸습니다.

  마찬가지로 에클레시아 안에서 가르치는 일을 했던 사람들이 있었고, 충격적인 것은, 병을 고치거나, 특별한 방법(수)을 사용하는 이들의 존재도 특별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교회에게 병 고침이나, 기적을 행함은 대단히 특별한 일로 보일테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수들 행함-병고침의 카리스마들-예언'의 순서가, 위의 9,10절에서는 뒤집혀 있습니다. 이렇듯 순서가 바뀌어있다는 것은 서열대로 나열한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키잡이들'이 있었습니다. 에클레시아 안에서 지혜로운 충고를 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방언이 맨 뒤에 언급됩니다. 가장 중요하지 않은 카리스마라 그런 것이 아닙니다(서열을 매기는 목록이 아니므로). 다양한 카리스마 중 하나라는 의미를 표현하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마지막 넘을 산은 바울이 추구하라고 말했던 "더 큰 카리스마들"이라는 표현입니다. 여기서 '더'라는 비교급이 사용된 것을 보고, 1) 어떤 이는 방언을 비롯한 지금까지의 카리스마들을 열등한 것으로보고 13장의 카리스마를 '더' 우월한 것으로 본다고 주장했습니다. 2) 또 어떤 이는 12장 전체 맥락을 생각하고서, 저 '더'라는 비교급이 고린도 에클레시아가 바울에게 보낸 옛편지를 가리킨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저 구절은 '(너희들이 지난 편지에서 주장하는 것보다) 더 숨에 속한 사람은 이러한 것이다'라는 의미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방식의 해석으로 읽어보고자 합니다. 즉 '더 큰 카리스마들'을 재정의하는 방식입니다. 즉 뒤에 이어질 13장을 '통하여' 드러나는 카리스마들이 '더 큰 카리스마'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지금까지의 카리스마들을 지키면서도, "훨씬 더 끝내주는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13장을 기대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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