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다고기 2016. 2. 5. 20:40

여백

고린도전서 10:1~33

   내 가족들이여, 나는 여러분이 이것을 모르길 원치 않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모두 구름 아래 있었고, 모두 바다 가운델 지났습니다. 그들은 모두 모세와 하나되어 구름으로 바다로 세례 받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숨에 속한 같은 음식을 먹었고, 모두 숨에 속한 같은 음료를 마셨습니다. 즉 그들은 자신들과 동행한 숨에 속한 바위에서 나온 물을 마셨는데, 그 바위가 메시아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 대다수를 좋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즉 그들은 광야에 흩뿌려졌습니다.

  어제 운동 경기를 가지고 이야기했던 바울은, 그것의 진의를 밝힙니다. 그 운동경기는 바로 출애굽을 가리킵니다. 그 운동경기의 출발점이 세례라는 뮈스테리온인데, 바울은 이것을 출애굽의 구름기둥과 갈라진 바다와 연결시킵니다. 이렇게 세례와 홍해 사건을 연결하는 방식은 로마서 6장에서도 사용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은, 현시대-오는시대로 출애굽하는 구원의 전체 그림을 조망할 수 있도록 합니다. 마치 실제 집에서의 삶을 상상해볼 수 있도록 만들었지만, 실제 집은 아닌 모델 하우스처럼 말입니다.(갈라디아서에서는 이 모델하우스를 실제 집이라 착각한 사람들에 대한 바울의 편지입니다.)

  그렇게 광야로 나아온 1세대 이스라엘은 숨에 속한 음식과 음료를 마셨습니다. 바울은 출애굽한 백성들을 신령한 바위가 거대한 물통으로서 끊임없이 따라다녔다는 유대 저술가의 표현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 물이 나온 바위가 바로 '메시아'였다고 말합니다.

  출애굽에 대한 이러한 묘사는 분명 고린도 에클레시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례를 받아 빵을 먹고 잔을 마시며 성찬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 성찬에 대해서 바울은 11장까지 논의를 이어갈 것인데, 문제는 세례받고 성찬에 참여하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결승점으로 잘 가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에클레시아는 이 점을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최후의 심판대의 결승점을 창조세계 전체가 통과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심판대가 시상대가 될(부활의 썩지 않는 월계관의 영광을 받을) 바울과는 달리, 고린도 에클레시아는 저희 아버지 자주 하시는 말로 "매를 벌고 있습니다."

  1세대 이스라엘은 그렇게 매를 벌다가, 결국 하나님에 의해 흩뿌려졌습니다. 이 표현은 이스라엘의 포로기를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구성력을 가지고 모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방 제국에 의해 이스라엘이라는 몸은 찢기고 흩어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우리의 본보기가 된 것은, 우리가 악한 일을 열망하는 이들이 되지 않기 위함입니다, 그들이 열망했듯이. 그림자 좇는 이들이 되지 마세요, 그들 중 어떤 이들처럼. 기록된 바와 같이 말입니다. "씨알이 앉아서는 먹고 마셨으며, 일어서서는 애 마냥 놀았다." 우리 포르네이아를 저지르지 맙시다. 그들 중 일부가 포르네이아를 저질러 하루 만에 23,000명이나 멸망 당했듯 말입니다. 우리, 주를 시험하지 맙시다. 그들 중 일부가 그분을 시험했다가 뱀에 멸망 당했듯 말입니다. 우리 불평하지 맙시다. 그들 중 일부가 불평하여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 당했듯 말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1세대 이스라엘의 이야기가 오늘날 현시대와 오는시대가 겹쳐진 새로운 광야를 걷는 이들에게 경고가 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1세대 이스라엘이 잘못했던 사안들을 열거합니다. 먼저는 우상숭배입니다. 금송아지 사건이 생각나실 겁니다. 금송아지를 숭배했던 모든 사람들이 그 날 즉결심판을 받았고, 그 금송아지는 갈아다가 모두 물에 타서 마셔버렸습니다. 자신들이 열렬히 숭배하던 것을 목구멍으로 넘기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그런데 이 우상 숭배는 언제나 포르네이아 문제와 밀접한 상관이 있습니다. 그림자를 숭배하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의 만족을 위함이고, 이 경우 그 사람의 성(性)은 자기 자신의 목적보다 상위의 목적 없이 방종으로 치닫습니다. 우리말에도 '얼레꼴레'라는 말이 있는데, 어느 할머니의 증언에 의하면 이 말은 '얼라(아이)'가 발기되어 있음에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상황을 가리키는 말이라 합니다. 고린도 에클레시아의 상황이 딱 얼레꼴레입니다. 포르네이아를 저지르면서도, 자신은 세례와 성찬에 참여하고 있으니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지만, 이러한 삶은 결국 생명력을 잃고 흩어져버릴 삶입니다.

  두번째 이유는 시험입니다. 1세대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테스트 했습니다. 맛사, 므리바라 불리우는 지역에서 물이 나오는지 나오지 않는지를 가지고 하나님을 시험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예수께서 사탄에게 시험받으실 때 인용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이 '시험'은 '강함'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일을 이루시기에 못 미더우니 테스트하고 싶어집니다. 이 강함에 대해서는 바울이 뒤에서 고린도 에클레시아 사람들에게 직접 물을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본보기로서 그들에게 일어났고, 우리의 경고를 목적으로 기록되었는데, (이는) 우리를 향해 현시대의 끝이 마주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서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지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시험은 여러분에게 닥치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면. 그런데 하나님은 신실하신데, 그분은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것을 넘어 시험당할 것을 허락하지 않으실 것이며, 오히려 시험과 함께 견딜 수 있게 하는 피할 길을 창조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오늘날을 살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본보기가 됩니다. 왜냐하면 이제 현시대의 끝이, 즉 주의 날이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 그 날이 시상대가 될지, 심판대가 될지가 오늘 지금 이 순간에 달려 있습니다. 세례도 성찬도 의지할 바가 못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여 타락의 습관을 고쳐낼 생각이 없으면, 새로운 피조물 되기를 스스로 포기한 사람입니다.
  열심히 수영을 배우던 친구가 정말 죽을 힘을 다해서 결승점을 향해 헤엄치고 있었습니다. 만일 그때 그럴 일은 없겠지만, 결승점이 움직이더니 점점 수영선수에게 다가온다고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직접 물어보았을 때, 그 친구는 그 결승점의 다가옴이 정말 살 것 같은 기분일 거라고 말했습니다.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봅시다. 물 속에서 그저 놀고 있던 아이에게 다가오는 결승점은 그저 공포 그 자체일 것입니다. 그 날이 지금도 다가오고 있습니다. 두려움인지, 기다림인지가 지금 이 순간 결정됩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이후 시험에 관한 유명한 구절이 등장합니다. '허락'이라는 동사를 살려야, 야고보 사도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시험은 사탄이 합니다. 하나님은 시험하지 않으십니다. 그는 우리를 시험하시기는 커녕, 오히려 시험을 '견딜 수 있는' 피할 길을 창조하십니다. 그 길은 시험을 견디면서도, 시험을 피하는 길입니다. 제 3의 길입니다. 시험을 '겪지 않을' 피할 길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실히 해두어야 겠습니다. 

  그러니 나의 사랑하는 이들이여, 그림자 좇음으로부터 달아나십시오. 나는 속 깊은 사람 대하듯 말합니다. 여러분이 직접 내 말을 판단하십시오. 우리가 축복하는 축복의 잔은 메시아 (흘리신) 피의 코이노니아가 아닙니까? 우리가 떼는 빵은 메시아의 몸의 코이노니아가 아닙니까? 즉 빵은 하나, 한 몸, 우리 여럿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한 덩이로부터 나누기 때문입니다.

  그림자 좇음을 '이기세요', '극복하세요' 가 아닙니다. '달아나십시오'입니다. 자신이 대단한 존재('속 깊은 이')라고 착각하고, 어떤 환경에서든 무엇이 닥쳐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입니다. 그림자 숭배로 만연한 고린도 지역에서, 그러한 숭배의 제의들이 벌어질 때, 바울은 피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진짜 '속 깊은 이'는 오만한 사람이 아니라, 피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이 역시 고린도 에클레시아에 대해 돌려서 까는 문장이라 생각합니다.

  또한 바울의 말을 고린도 에클레시아 사람들이 직접 판단 해야 하는 것은, 그들이 현시대에 놓인 팩맨들이기 때문입니다. 에클레시아 밖의 사람들에 대해서 판단하지 않지만, 같은 사안의 문제를 에클레시아 안의 관계 안에서 판단하고 해결해나가야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앞에서 소송 문제와 관련해서 판단에 대해 말한 것을 여기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오늘 10장 맨 앞부분에서, 바울은 신령한 음식과 음료를 마신 1세대 이스라엘의 이야기로 운을 땠습니다. 그들이 먹고 마신 음식과 음료의 참 의미를 바울은 여기서 얘기합니다. 그 음식과 음료는 바로 메시아의 몸과 피였습니다. 그것을 먹고 마신다는 것은 우리가 메시아의 몸의 세포가 되는 일이었습니다. '코이노니아'는 '참여'로 번역되지만, 이는 참여를 넘어선 하나됨입니다. 서로 세포간 물질을 자유로이 주고 받으며 하나의 몸을 이루듯, 메시아 몸에 코이노니아 된 다는 것은, 그 몸의 일부가 된다는 말입니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12장에서 자세히 이야기할 것입니다.

  빵은 하나, 한 몸, 우리 여럿입니다. 여기서 삼위일체를 봅니다. 하나이지만 여럿입니다. 이것이 가능해야 다양하면서도 하나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와 여럿이 '하나'되는(처음의 하나와 뒤의 하나는 분명 같지만 다른 하나일 것입니다) 기이함이 바로 그 한 덩이로부터 시작했습니다. 누룩 없는 한 덩이.

  살몸에 따른 이스라엘을 생각해 보십시오. 제물을 먹는 사람들이 그 제단의 코이노니아들이지 않습니까? 그러면 내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어떤 제사 음식이 있다는 것입니까? 어떤 그림자가 있다는 말입니까? 오히려 그들이 제사한 것은 다이몬들에게지, 하나님께 제사드린 것이 아니며, 나는 여러분들이 다이몬들의 코이노니아들이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여러분은 주의 잔을 다이몬들의 잔과 (함께) 마실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주의 식탁으로부터 나눌 수 없습니다, 다이몬들의 식탁과 함께. 아니면 우리가 주를 질투하시도록 자극하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가 그이보다 더 강한 이들입니까?

  그러니 성찬의 의미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 고린도 에클레시아 사람들은 성찬을 일종의 백신이나 쉴드로 이해한 것 같습니다. '나는 성찬에 참여했으니, 우상들의 신전에 들어가도 괜찮아.', '나는 성찬에 참여했으니, 우상 신전의 고기를 먹을 수 있어.'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우상 숭배의 제의를 통해 그 음식을 먹는다면, 그것은 메시아가 아닌 다른 무언가의 일부가 되는 것이라 말합니다. 그렇다고해서 실제로 어떤 우상이 존재한다거나, 실제로 우상의 영향을 받는 음식이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우상들 뒤에는 하나님이 아니면서 사람의 관심과 숭배를 받을 수 있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다이몬'이라 부릅니다.

  흔히 '귀신'으로 번역됩니다만, 다이몬은 어떤 영적은 세력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다이몬이라고 해서 모두가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천사는 좋은 다이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악마는 타락한 다이몬입니다. 그리고 그 중간지대의 다이몬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이몬은 전체가 아닌 개체에 영향을 끼치는 보이지 않는 힘입니다. 이것을 월터 윙크는 칼 융의 심리학을 빌어 집단 무의식으로 설명하고자 합니다만, 어찌되었든 다이몬은 전체를 관할하시는 하나님이 아닌, 개체주의의 영이요, 메시아의 사람들이 섬길만한 것이 아님에 분명합니다.

  그리고 다이몬의 식탁에 참여하면서도 자신들은 '성찬에도 참여하는 강한 사람들'이라 생각했던 오해를 바울은 바로 잡습니다. 이러한 강함은 하나님의 강함이 아닌 자신의 강함을 신뢰하는 거짓이요, 곧 위에서 언급한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이 됩니다. 즉 내가 우상 신전에 들어가서 먹을 수 있느냐 없느냐를 가지고 하나님이 계신지 안계신지 시험하는 일이 되었던 것입니다.

  "모든 것이 상관없다." 그러나 모든 것이 유익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상관없다." 그러나 모든 것이 집 짓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 자신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 속한 것을 추구하십시오. 시장에서 파는 모든 것은, 양심을 통해 판단하지 말고, 드십시오. 왜냐하면 "땅과 그 안에 넘치는 것들이 주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신실함 없는 이들 중 하나가 여러분을 만찬에 초대했고, 여러분이 가고 싶으면, 여러분 앞에 차려진 모든 것은 양심을 통해 판단하지 말고 드십시오. 그런데 만일 누군가 "이것은 제단에 바쳐진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언제나, 여러분에게 그 말을 해준 그 사람과 양심 때문에 먹지 마십시오. 그런데 내가 말한 양심은 여러분 자기 자신의 양심이 아니라, 타인의 양심입니다. 무슨 목적으로 내 자유가 타인의 양심에 의해 판단 받는 것입니까? 만일 내가 '감사로' 음식 먹음에 참여한다면, 내가 잘 감사드린 것 때문에 무슨 욕을 먹는단 말입니까?

  고린도 에클레시아 사람들의 강한 척 하는 말을 들어보십시오. "모든 것이 상관없다." 현대인의 외침을 듣는 것 같지 않습니까? 모든 것이 가능하지만, 그 가능성 안에서 모두에게 유익이 되고, 또한 타인에게 내어줄 수 있는 새로운 공간을 창출하는 일이 필요하며, 이 일이 바로 에클레시아의 몫입니다. 그러나 고린도 에클레시아는 성찬을 통해서, 자신들은 무엇을 해도 괜찮은, 높은 영적 경지에 올라있다고 단단히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바울이 주는 실제적 지침은, "우상 제의에 참여하지 말 것, 그러나 시장에 나온 음식들은 먹어도 괜찮음"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서 밝히기를, 타인 때문이라 말합니다. 나는 나의 양심에 의해 판단하기 전에, 타인의 양심에 의해 판단받는 존재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상 제의에 참여하지 않는 것과, 혹여나 초대된 식사 중에 먹는 음식이 신전에서 나온 음식이었음 알게 되었을 때, 먹기를 멈추는 것은 모두 일관적인 원리가 적용되고 있습니다. 9장에서 언급했던, 옳고 그름의 기준이 아직 잘 세워지지 않은 약한 사람들을 위함입니다. 바로 이 목적입니다. 집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무엇을 먹고 마시든, 무엇을 하든, 모든 것을 하나님의 뚜렷을 위해 하십시오. 유대인과 헬라인과 하나님의 에클레시아 앞에 걸림 없이 서십시오. 내가 모든 것을 모두에게 맞추어 기쁘게 하듯,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많은 이들의 유익을 추구하세요, 그들을 건지기 위해.

  그리고 그 집을 세우는 것, 타인을 섬기는 것이 지향하는 더 궁극적인 목적은 바로, 위에 써있는 그대로 입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