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 시인이 '잃는 것은 얻는 것이다' 했던 그 심상을, 장석남 시인은 '번짐'이라 표현한다. 목련꽃은 번져서 여름이 되고, 너는 번져서 내가 되고, 그렇게 번짐은 서로를 서로되게 한다.
다만 번짐은 '눌림' 으로 퍼져가는 것. 눌리길 거부하는 이들은, 서로를 서로 되게 하는 이 사랑의 울림 속으로 들어올수가 없다. 그러나 번져야 살지. 예수가 가난한 자로 이 땅에 오신 이유, 십자가를 지신 이유, 그이는 번지기 위해서 눌리기로 작정하셨다.
삶은 번져 죽임이 된다
죽음은 그러므로 번져서
이 삶을 다 환히 비춘다.
오늘 예수는 나에게 이러한 삶을 뵈주고, 나 역시 이 안으로 들어오라 하신다. 하나님과 예수 사이,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 예수와 공동체 사이. 하늘과 땅 사이. 거기서 나는 죽어서 너를 너 되게, 세상을 세상되게. 이건 끝이 아니야. 죽어서 내는 사랑의 울림. 이렇게 사는 길만이 하나님 뚜렷.
사랑은, 죽고 살아서 이룸이다. 꽃도 그렇게 사랑하고, 계절도 그렇게 한다. 세상이 온통, 세상 지은이를 닮아, 죽고 삶으로 사랑한다. 뜻없는 반복의 헛헛함이 아니라, 창조주의 아름다움인 것은, 죽음이 끝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잘못된 것이냐, 내게는 세상이 온통 하나님이 사랑으로 뵈는데. 죽고 사는 자연 속에 하나님의 숨결이 있는데. 번져감 속에도 뚜렷함이 있으니, 잃는 것은 잃는 게 아니다. 오히려 얻는 것이다.
십자가를 지라 하심은, 나도 죽고 살아서 이루는 그 사랑 안에 들어오라 하심이다. 김용의 선교사 말대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초대, 죄인을 향한 놀라운 자비의 초대. 나는 우주 전체가 보여주는 위대한 교향곡을, 작곡가와 함께 협연할 것을 제안받았다. 번지리라는 굳은 다짐 속에, 예수와 같은 숨결.
목련은 봄에 핀다. 그리고 '번져서' 여름을 가져온다. 여름에 핀 이름 모를 꽃도 번져서 열매를 가져오고, 이것은 여름이 번져 가을을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번짐이란, 새로운 것을 가져오는 신호와도 같다.
[봄-여름-가을]-[(겨울)]-봄
삶 죽음
우리는 3연을, 1연과 2연을 종합하는 내용이라 읽었는데, 그 이유는 3연에서의 '삶'이 봄, 여름, 가울을 뜻하고, '죽음'은 쓰여있지 않은 겨울을 가리키는 말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봄, 여름, 가을의 약동하던 생명이 번져 겨울이 되었다. 삶이 죽음이 되었다. 마치 생동감있게 진동하던 음악이, 멈춰버린 그림이 된 것처럼.
그런데 이 죽음은 끝이 아니다. 오히려 죽음은, 삶을 오히려 뚜렷하게 한다. 그리고 죽음도 번짐이라면, 그 죽음은 무언가 새로운 것을 가지고 올 것이다. 만사가 번짐임을 알면, 번졌음에도 낙심하지 않는다. 번짐 뒤에 올 것을 기대한다. 그것이 아무리 참혹한, 모든 것이 정지되어버린 죽음이라 할지라도. 따라서 죽음은 오히려 삶을 비추는 등불이다. 그리고 또 한 번, 모든 계절 속에서 늘 그랬듯, 이 추운 겨울 속에서도 저녁이 번지고 밤이 된다.
그리고 나타나는 봄나비. 새로운 계절의 새로운 생명. 죽음의 겨울이 번져 낳은 새로운 삶. 그리고 비로소 깨닫는 것은, 이 모든 과정이 '번짐'을 통해 일어났다는 것이고, 그 번짐을 '사랑'이라 부른다는 사실이다. 곧 번짐은, 새로운 삶을 내다보고서 오늘 내가짊어지는 십자가다.
이야기가 하나 있다. 그 이야기는 봄, 여름, 가을을 지나 겨울을 만나는 이야기다. 갈릴리 바닷가를 거닐던 한 사람은 예루살렘을 지나 해골언덕에서 십자가에 매달렸다. 그러나 그것은 번짐이었다. 그이의 몸은 싸늘하게 식어 더이상 움직이지 않았으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이는 나비가 되어 나타났다. <꽃들에게 희망을>에 나오는 그 나비와 같이, 그이는 더이상 벌레의 모습이 아닌, 겨울에도 끄떡없는 새로운 존재가 되어 대지 위에 섰다.
이 이야기 위에 서면, 믿고 번질 수 있다. 번짐은 부당함으로 시작해서 억울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새로운 봄이 온다는 이야기를 믿으면, 번질 수 있다. 번지고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