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바울같은 사람이 무슨 생각하며 사는지가 무척이나 궁금합니다. 어찌 생각해야 바울처럼 올곧게 살 수 있을까요? 만약 그가 천성적으로 참된 사람이라면, 뭐 그러려니 하겠지만, 우리는 그가 원래부터 참된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깨닫게 된 그 날 이후부터 그리 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언제나 충격적인 행보를 걸어왔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를 만난 이후 그의 삶은 방랑자였으며, 어느 동네 가서나 함께 호흡하며 살아갈 수 있는 공동체 만드는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했습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바울의 생각을 엿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눈여겨 봐야할 단어는 '순간'과 '새로이'입니다. 이 '순간'이라는 말과 '새로이'라는 말을 붙이면, '영생'이 됩니다.
유대인들은 두 가지 시간개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악이 횡행하는 현시대요, 다른 하나는 인자가 다스리시는 오는 시대입니다. 이 '오는 시대에서의 삶'을 가리켜 '영생'이라 부릅니다. 그저 영원히 사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지금 바울은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오네시모가 주인에게서 도망쳐나오고, 감옥에서 자신을 섬기고, 이제 다시 주인에게로 돌아가는 이 모든 일들이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 그런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순간은 다름 아닌 현시대에서 오는 시대로 넘어가는 문(門)입니다. 서로의 관계가 뒤틀려, 한쪽은 복수를, 한쪽은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가던 사람들이, 이제 함께 이 문을 지납니다. 곧 새로운 관계로 진입하는 것입니다. 그 새로운 관계란 용서와 화해의 관계, 곧 사랑의 관계, 인자가 다스리시는 관계입니다. 곧 오는 시대입니다.
즉 필레몬에게 노예를 공동체 안에서의 동등한 인격, 즉 형제로 대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를 이렇게 대하는 것이 오는 시대의 삶을 시작하는 입구입니다. 바울은 다름아닌 이 오는 시대의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현시대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노예든 주인이든 죄다 노예제도를 잘못이라 여기지 않는 상황 속에서 바울은 필레몬에게 오는 시대의 삶을 살라고 합니다. 이것은 필레몬이 받아들이기에 너무 벅찬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필레몬을 위해 '떠나게 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라며 완곡하게 표현합니다. 그러나 하고픈 말의 요지는 분명합니다. 노예였던 오네시모와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는 시대를 사는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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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몸소 자신이 그렇게 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바울에게 오네시모는 노예가 아닙니다. 예수 공동체의 식구입니다. 그냥 밥만 같이 먹는 사이가 아닙니다. 그가 무언가 잘못했거나, 빚을 졌거든 자신에게 돌려놓으라 말합니다. 즉 대신 책임져주는 사이입니다.
서로 책임을 떠넘기려는 관계는 이미 인류 최초의 부부가 보여주었습니다. 여자는 남자에게, 남자는 뱀에게 책임을 떠넘기며, 자신은 결코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발악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인간사에서 벌어지는 모든 문제마다 남에게 책임을 지우는 모습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국가 재난 사태가 벌어져도 서로 책임을 떠넘기기 바쁘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누구 하나 희생양이 되어 온통 처벌을 짊어지고 문제를 덮어버리지 않습니까? 그러나 책임을 지는 것과 처벌을 지는 것은 다릅니다. 처벌을 받는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온통 이 책임 문제 때문에 관계가 틀어지고 사회가 병듭니다. 함께 살기 위해 문제를 해결할 생각해야 하는데, 자신이 가진 것에서 조금도 잃기 싫어서 자신을 책임과 상관없는 사람으로 만듭니다. 돈과 권력에 대한 추구는, 돈과 권력으로 책임을 회피할 수 있다는 생각이 만연해있는 사회에서만 벌어집니다.
그런데 여기 책임을 지우는게 아니라, 내가 책임을 지겠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울입니다. 마치 그는 부모와 같습니다. 부모는 자식의 책임을 스스로 지고자 합니다. 그래서 앞에서 바울이 오네시모를 가리켜 자신의 아들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스스로 타인의 책임을 끌어안으려는 모습은 곧 아담과 하와의 역전입니다. 타락의 뒤집음입니다. 마치 오델로처럼 이러한 사람 한 사람이 삶을 현시대에서 오는시대로 뒤집으면, 주변의 사람들도 영향을 받습니다. 그래서 같이 뒤집어나가면 한 줄을 금새 뒤집습니다. 이렇게 세상을 뒤집기 위해, 먼저 뒤집힌 사람들이 곧 언약 공동체입니다.
더불어 바울은 오네시모에 대해서 필레몬에게는 어떠한 책임도 지우지 않으려 합니다. 이 모습은 모든 책임을 자신이 짊어지려는 한 사람을 닮지 않았습니까? 마치 논개마냥, 모든 사람들의 복수심과 탐욕들을 다 끌어안고 나무에 걸려 높이 들린 한 사람을 닮지 않았습니까? 그러고보니 바울은 참말로 오는 시대를 사는 이요, 그 오는 시대는 저 사람을 닮아가며 누리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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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필레몬에게 간절히 부탁합니다. 이것은 그에게 책임을 지우겠다함이 아닙니다. 그와 같은 일로 연결되기 위함입니다. 곧 영생과 그리스도입니다. 필레몬이 오네시모를 자신의 형제로 받아들일 때, 그는 영생을 누리고 그리스도를 닮아갑니다. 이 모든 일이 필레몬과 오네시모가 다시 만나는 그 순간에 달려있습니다. 바울이 이 순간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함께 '오는 시대'로 들어가느냐, 아니면 그 문을 스스로 닫아버리느냐! 그 오는 시대의 문턱 앞에서, 오는 시대의 실체를 알고 있는 바울의 애가 끓고 있습니다. 여기서 '애'는 '창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원어성경도 '내장'을 쓰고 있으니 단어가 똑같습니다. 속이 끊어질듯 아픈 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오는 시대를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볼 때, 우리의 마음이 이러해야겠습니다. 또한 나는 오는 시대를 진정 살고 있는 것인지도 되물어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