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애굽기 4:22, 에레미야 31:9, 시편 89:27 그리고 로마서 8:29의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
-'하늘 + 땅 = 만물' 을 보여주는 좋은 본문. 게다가 '하늘'과 '땅'의 의미도!
-그리스도는 본래 주님이셨지만, 죄와 죽음을 물리치심으로 실제로 주님이 되셔야만 했다(로마서 1:3,4, 사도행전 2:36). 인정, 입증, 보여주고 증명.
-하나님께서 좋게 생각하신 '예수 안에서의 충만'과 '예수를 통한 세상과의 화해'. 고린도후서 5:19
-19절의 희랍어 본문에는 '하나님'이 없지만, "모든 흘러넘침"은 "하나님이 모든 흘러넘침으로"의 완곡한 표현일 것
-"그이 안에서" - "그이를 통하여"- "그에 이르는 것"
16절과 순서가 동일. 이때 "그에 이르는 것"의 '그'는 누구? 하나님.
-재차 강조하는 역할의 "그이를 통하여"가 NIV에서는 생략되어 있다.
-이 시의 큰 두 가지 주제가 뒤에서 상술된다.
1) 지혜와 율법의 역할을 예수가 담당하셨다(2:6~23)
2)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창조되기 시작한 인간이 새 창조의 서막(3:5~4:6)
-단락 간의 관계를 키아스무스 안에서 이해 : 창조와 새 창조로 감싸있는 에클레시아
-그리고 이 새 창조의 시는 출범한지 얼마 되지 않는 골로새교회에 적용된다. "여러분"
이 시는 연구할 가치가 무궁무진한, 골로새서의 '메시아 시'입니다. 바울이 골로새서 중간에 인용한 시인데, 정말정말 유명한 구절입니다. 그러니 두 번 읽어야 합니다. 자꾸자꾸 읽어서 무슨 의미일지 곱씹어 볼만한 가치가 있어요. 이 세상 모든 것은 하나님이 말씀으로 창조하신 한 편의 시에요. 그 시적 운율과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이 곧 그 분을 느끼는 일입니다.
[1]
흔히 부인이 자기 남편에 대해서 얘기할 때, "우리 그이는 말이야" 이렇게 얘기합니다. 여기서 힌트를 얻어, 예수를 가리키는 3인칭 단수를 '그이'라고 썼습니다. 그 분은 우리의 신랑, 우리는 그 분을 맞이할 신부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의 첫번째 부분은 그 분이 어떤 분이신지 이야기합니다. 그 분은 하나님의 아이콘입니다. 아이콘은 희랍어를 그대로 가져온 것인데, '형상'이라 번역됩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컴퓨터 아이콘과 마찬가지입니다. 이 편이 이해가 더 쉽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프로그램을 실행한다고 생각해봅시다. 그 프로그램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어떤 인터페이스를 보여줄지는, 보이지 않으니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오로지 눈에 보이는 것은 푸른 하늘과 잔디가 깔린 바탕화면 속 아이콘 뿐입니다. 그 아이콘을 누르면, 그 때 비로소 그 프로그램의 전모를 알 수 있습니다. 즉 예수는 하나님의 아이콘입니다. 그이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보여주는 세상에 놓인 아이콘입니다.
이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할 여지가 남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도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고, <도덕경>의 "이름 있는 것이나 없는 것이나 한 입에서 나왔다"는 구절도 이와 상관있을 것입니다. 최근에 메를로 퐁티의 책을 읽었는데, 책 제목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다들 무언가 보이지 않는 차원이 있다고 생각했고, 그 보이지 않는 차원이 보이는 차원과 어찌 관련이 있는지를 고민했던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지요. 정의, 평화, 사랑, 믿음, 우리가 옳다고 믿는 가치들은 죄다 보이지 않는 것들 뿐입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들이 정말 '있음'을 어찌 확신할 수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이 땅에 어찌 구현할 수 있을까요? 이는 모든 인류의 숙제입니다. 올바르게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늘 하던 고민이라 생각합니다. 바울도 예외가 아니었을 겁니다.
잡설이 길었습니다. 어찌되었든 이 '메시아 시'는 그 하나님의 아이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얘기합니다. 그이는 먼저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입니다. 먼저 나신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이안에서 모든 것들을 창조하시기 위함입니다. 즉 그이 밖에서 창조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참 마음이 시원합니다. <성경>외의 다른 경전 속에서도 그리스도 닮은 것들이 있다고 생각하면 어떻습니까? 창조된 모든 사람과 사물의 메카니즘 안에는 그리스도적인 것이 녹아 있다 생각하면 어떻습니까? 심지어 선(善)과는 상관없어 보이는 높은 자리, 권력, 통치권, 권한들이나 할 것없이 모조리 그이 안에서 창조되었다고 이 시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만물에게 '목적'이 주어졌습니다. 그 목적이란 그이에 이르는 것입니다. 창조의 원형, 곧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는 것입니다. 즉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하나되는 것이 창조 목적입니다. 보이는 예수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맞닿아 있었습니다. 숨결로 말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곧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보이는 차원과 보이지 않는 차원 사이에 있는 완전한 몸이 곧 부활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늘의 차원과 보이는 땅의 차원이 하나되는 것이 창조 목적입니다. 이 점을 잘 기억해두시기 바랍니다.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의 하나됨. 이게 우리네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가 이러한 삶의 모범이 되셨습니다.
[2]
그이가 만물보다 먼저 나셨습니다. 또한 만물이 그이가 없으면 설 수가 없습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이러한 구절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그이는 만물을 붙드신다는 것입니다. 곧 만물이 제대로 설 수 있도록 지탱하신다는 말입니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토대가 되신다는 말입니다.
지구는 거대한 공동체입니다. 공동체가 아니고서야 살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것은 사람만 가지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공기를 마셔야 하고, 무언가를 죽여서 먹어야 합니다. 나만 그런게 아니라 다른 사람도 그러니까 함께 도와서 먹거리를 만들고 먹고 일하고 하는 일들 속에서 하나로 묶여 있습니다. 그래서 만물은 서로 대속관계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달려서 우리의 죄를 사해준 것만이 대속이 아니라, 우리가 날마다 먹는 고기와 식물, 또한 우리를 위해서 대신 노동해주는 누군가 역시 모두 대속입니다. 인류는 서로를 위해 희생하지 않고는 살 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타인을 위해 희생하기가 너무도 싫으니까, 돈의 관계로 묶어서 억지로 희생하게 만들고, 또한 전혀 이 희생에 동참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 마저도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모두가 서로에게 대속하는 관계가 되어야 건강한 공동체 입니다.
어찌되었든, 참되든 참되지 않든 모두 공동체라는 점이 제가 하고 싶은 말입니다. 그런데 그이는 공동체의 머리가 되십니다. 예수를 인정하든, 예수를 인정하지 않든, 그이는 모든 공동체의 머리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이가 계시지 않고는 존재할 수 있는 창조물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토대를 인정하고, 그 뜻에 따라 참되게 사는 공동체와, 삐뚤어진 공동체가 있을 뿐입니다.
그이는 함께 사는 이 지구 공동체의 머리가 되십니다. 유기체적으로 순환하는 세계 공동체의 머리이십니다. 그래서 그이는 '아르케'이십니다. 이 아르케라는 말은 참 재미있는 말입니다. 지배라는 뜻도 있고, 시작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느 한 점에서부터 끝까지 이르는 영향력을 뜻하는 말이라 하겠습니다. 블랙홀을 거꾸로 돌린다고 생각해보세요. 한 점에 모든 것이 빨려드는 것이 아니라, 그 한 점에서부터 모든 것이 나오는 것입니다. 노자의 玄이 곧 아르케입니다. 그러나 그이는 모두를 말려죽이려는 부패한 권력과는 다르십니다. 그이는 생명의 권력입니다. 생명의 다스림입니다. 그 증거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이는 부패한 권력과 그에 선동된 민중에 의해 죽임당하셨으나, 다시 살아나시지 않았습니까? 넘치는 생명력! 그래서 그이 안에서 만물이 창조되었을 뿐 아니라, '만물 안에서도' 그 자신이 처음이 되셨습니다. 생명의 아르케로서!
[3]
그래서 그이로부터 생명이 흘러넘칩니다. 생명이 무엇입니까? 곧 숨입니다. 부활의 능력, 곧 하나님의 거룩한 숨결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지신게 끝이 아닙니다.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부활하신게 끝이 아닙니다. 승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승천하신게 최종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이 하늘로 가신 이유는,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시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그 성령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최초 예수 안에서 만물을 창조하실 적에, 그 창조하신 힘이 무엇이었습니까? 그 분의 말과 함께 나오는 숨이었습니다. 아담에게 불어주신 생기요, 예수를 죽음가운데서 일으키신 바로 그 능력이었습니다. 예수로부터 그 하나님의 숨결이 흘러넘칩니다.
'하늘'은 다른 말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차원'을 뜻하는 유대인들의 용법입니다. '땅'은 보이는 차원입니다. 그러면 이해가 쉽습니다. 승천, 곧 예수께서 보이지 않는 차원으로 가신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 보이지 않는 차원에서부터 우리에게 숨 부어주시기 위함입니다. 숨 부어주시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화해입니다. 만물의 화해입니다. 그 숨 받은 사람들로부터 사람과 사람사이의 화해가 이루어지고, 종국에는 그 숨이 노아 홍수 때 비처럼 부어져, 하늘과 땅을 하나되게 할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차원과 보이는 차원이 하나로 어울리게 될 것입니다. 곧 태극입니다.
이에 대한 증거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그이가 보이는 차원을 올곧이 믿어, 숨결을 따라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아 화해의 정점에 선 사건입니다.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에게 복수하지 않고 도리어 용서했던 충격적인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시작으로 우리는 알게 되었습니다. 만약 그리스도가 역사의 처음과 끝이라면, 그 분이 보여준 이 십자가로 인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역사의 결말입니다. 그리고 그 역사의 결말은, 분열과 찢김이 아니라 화해일 것입니다. 사람들끼리의 화해 뿐만이 아니라 만물의 화해일 것입니다. 하늘이 내려와 땅과 결혼하고, 모든 물과 같은 몸들은 생명의 포도주로 바뀌며, 생명나무 열매를 누구나 먹게 되는 날이 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에덴을 없애버리신게 아닙니다. 지금도 에덴은 하늘에서 자라고 있습니다. 그 에덴이 옵니다. 그리고 이 땅의 무수한 아담들이, 그리스도가 되어 그 에덴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지구는 거대한 에덴이 되고, 그 에덴에는 그리스도들이 참된 세상을 이루며 살아갑니다. 궁극적 화해. 이것이 역사의 결말입니다.
하나님이 지금도 이것을 위해 열심을 내고 계십니다. 하늘에 우리가 거할처소가 많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 말은 우리가 죽어서 천국가면 자리가 모자르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늘 하늘과 하나되어 사는 당신의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 당신도 그리스도요, 화해를 위해 보냄받은 사도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열심을 내야지요. 결말을 믿는이, 현실 속에서 열심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 하나만 더 말합시다. 보이지 않는 차원은, 언제나 보이는 차원과 중첩되어 있습니다. 지금 당신이 속한 그 공간이 곧 보이지 않는 차원이자, 보이는 차원입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눈이 아니라 믿음으로 보세요. 그럼 그 자리에 숨 부어주시는 그이가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럼 달라하세요. 달라하면 주신다 하셨으니, 그 자리에서 숨결 받아, 오늘을 화해의 날로 사세요. 그렇게 함께 그이에게 이르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