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바울은 '카리스'를 따라 '카리스마타'가 있는 공동체가 어찌 생활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바울은 공동체가 하나님으로부터 '다양하고 탁월한 카리스'를 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그 다양하고 탁월한 카리스가 공동체 안에서 어찌 구현되는가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중이다. 오늘 본문도 그 연장선 위에 있다.
여러분을
여기서 여러분은 예수 공동체의 사람들이다. 이들은 하나님 앞에서 사람 앞에서 올곧게 살아가고자 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했던 그들은 의도하지 않았으나 사회정의의 중심에 서 있었다. 생각해보라. 남녀노소 차별하지 않고 가족이라 부르며, 자기 것을 아끼지 않고 나누던 공동체를. 그들은 왕이 손댈 생각도 하지 못했던, 부의 재분배와 소외계층 복지의 문제들을 본질적으로 해결하고 있었다. 예수 공동체가 A.D. 1세기 폭발적으로 커진데에는 이러한 이유가 있었다.
이렇게 된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와 40일간 함께 생활한 사람들은 각지로 퍼져나가 공동체를 만들었다. 그 공동체는 부활한 예수의 뜻을 따라, 사회적 죽음에 맞서며 올바른 사람살이를 구현해나갔다. 이 사람살이에 대한 사회의 소회계층의 지지는 폭발적이었고, 후에는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지정할 수밖에 없었다. 국가적 차원에서 진리를 무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가 정권과 손을 잡은 측면도 있겠지만, 그 보다 로마 지도부의 '어쩔 수 없음'이 더 크다. 기독교를 인정하지 않고는 민중을 대할 수 없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진리가 진리로서 인정되는 것은 민중이 그 진리 안에 살 때 이루어진다.
핍박하는 자들을 축복하십시오
그 '여러분'이 구현하는 진리는 항상 핍박을 받아왔다. 진리는 '하나됨'이다. 그런데 사회를 둘로 쪼개어 보는 사람들은 '진리'가 못마땅하다. 하나되기 위해서는 내가 선그어 놓았던 저들과 손 잡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 하나됨에는 등돌리고 둘 됨을 더욱 공고히 하고자 한다. 곧 계급의식이다. 자기 자신이 높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둘'을 생각하지 않는다. 줄곧 '하나'를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들을 핍박하는 사람들 역시 결국 자신들과 하나될 사람들임을 알고 있다. 자신들을 핍박하는 자들도 전체라는 몸의 일부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저주할 수 없다. 손이 발을 저주해서 무엇하겠는가? 자신들을 핍박하는 자들은 몸의 병든 부분이다. 또한 곧 병이 낫고 회복될 몸의 부분들이다. 오히려 병 낫기를 기도해주고 빌어주어야 할 지체들이다. 예레미야가 이스라엘을 짓누르는 바벨론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외쳤던것 처럼, 예수께서 너희가 원수처럼 생각했던 로마 사람들을 사랑해야 말씀하신 것처럼. 누군가 이 하나됨을 추구할 때, 둘을 나누고 있던 벽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그럼 이 '하나됨'을 어떻게 시작할 수 있을까?
기뻐하는 자들과 함께 기뻐하고,
흐느껴 우는 자들과 함께 우십시오.
이렇게 시작한다. 이렇게 할 수 있음은 '둘'생각을 치워버렸을 때 할 수 있다. 둘을 치워버림은 곧 '공감'이다. 같이 느낌이다. 기쁨과 슬픔을 같이 느낌으로 하나됨이다. 누군가 억울한 일을 당했으면, 같이 소리 높여 울어 주고, 누군가 좋은 일이 생겼으면 같이 좋아해주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마음으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우선 몸에서 가장 겸손한 발부터 시작한다. 억울한 일 당한 사람을 찾아가, 그들의 처지를 보면, 마음이 움직인다. 그 상황에 함께 동참하면, 함께 기뻐하고 함께 우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서로를 향해서 이와같은 마음을 품어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오히려 짓눌린 사람들과 어울리십시오.
높은데 마음을 둔다는 것이 계급의식이다. 둘의 마음이다. 이 마음으로는 짓눌린 사람들과 함께 어울릴 수 없다. 사회의 지도층이 이런 마음이라 오늘날 문제가 심화되고 있지 않은가? 우리 자신들도 이러한 마음 가진 것은 아닌가? 어제 국회 앞에서 들었던 설교 말씀이 오늘 아침에도 내 눈 앞에 있다. 높은데 두는 마음이 교만인데, 교만을 이기는 것은 '겸손해야지'라는 내적 성찰이 아니다. 짓눌린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이, 높은데 두었던 내 마음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는 일이다. 교만은 비천한 자들과 함께 함으로 이겨내는 것이다. 어제 이러한 말씀을 들었다.
자신에 대해서만 사려깊은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오늘 마지막 구절을 보라. 그럼 어디에 사려 깊어야겠는가?
11478日
로마서를 줄곧 보면서, 내가 맞닥뜨리는 상황과, 그 날 보기로한 본문이 절묘하게 겹치는 때가 많았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다. 같은 이야기를 하나님이 자꾸 나에게 반복하신다. 아직도 내가 못알아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A.D. 1세기 예수 공동체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억울한 일을 당한 세월호 유가족들과 함께 울어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함께 부조리한 처사에 항거했을 것이다. 분명히. 왜냐하면 예수의 부활은 바로 그러한 의미이기 때문이다. 부활은, 죽음을 비롯한 세상의 어둠에 대해 너희가 이미 이겼다는 승전보다. "믿고 돌파해 나가"라는 그리스도의 응원이다. 그러니 절망을 가지고 전쟁터에 나갈 수 없다. 예수께서 이기셨으므로, 결국 정의가 이길 것이고, 사랑이 승리할 것이다. 그를 믿으라!
그러나 그간 우리는 그 승리를 핑계로 전쟁터에 나가기를 꺼려했던 것은 아닐까? '우린 분명히 이길 거니까, 나까지 열심히 싸울 필요는 없어라고 생각했던 건 아닐까?' 사랑과 정의가 없어서 아파하는 전우들에 대한 애통한 심정 없이는 그 어떠한 승리도 기쁘지 않을 것이다. 함께 울지 않았는데, 어찌 함께 웃을 수 있겠나?
너희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너희가 배부르게 될 것이다.
너희 지금 슬피 우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너희가 웃게 될 것이다. (눅 6:21, 새번역)
그들과 함께 울고 웃자. 끝까지 아무도 저주하지 않고, 하나로 남기 위해 싸우자. 이 자리가 그리스도의 자리라 확신한다. "그 자리에서 얻는 기쁨이란, 집에서 티뷔보면서 얻는 기쁨과는 다를거야." 줄곧 자기만 생각하고, 집에서만 떠들었던 오목천동의 윤씨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