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뻔뻔한 현실과 심판의 부활, 그리고 용서와 떳떳함

파다고기 2017. 2. 4. 21:24

1. 모든 사람의 부활은 모든 사람의 용서

  바벨탑 짓던 사람들도, 죽임당한 가나안 사람들도, 아담과 하와도, 카인도 아벨도,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모두 부활합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 모두를 위해 죽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5:15
그리고 모두를 위해서 그 한 사람이 죽었습니다, 이는 사는 이들이 더 이상 자기 자신을 향해 살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을 위해 죽었고 일어난 이를 향해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모두를 위해서 한 사람이 죽었습니다. 죽음은 아담의 죄의 결과로 찾아온 것이지요(로마서 6:23). 모두가 부활할 수 있다면, 그 모든 사람들의 죄가 해결되었기 때문입니다. 죄 없는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해 죽었습니다.

  원래 이 '모든 사람의 부활'이란 생각은 전세계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유대인들에게도 없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혈통상 유대인만 부활한다고 생각하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의 통념을 깨고 실제로 벌어진 일은 예수님 홀로 부활하신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남은 모든 사람, 심지어 예수님 이전에 죽었던 사람들도 포함해서 온 인류가 부활할 일만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과 모든 사람의 부활 사이에 살고 있는 거에요.

  이땅에서 결국 죽음은 사라질 것입니다. 그런데 죽음이 죽어버렸을 때, 예수님은 두 종류의 부활이 있을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는 '영광의 부활'이고, 다른 하나는 '심판의 부활'이에요. 나는 어떤 모습으로 부활할까요?

  그런데 이상합니다. 모든 사람이 부활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용서되었다는 것인데, 왜 부활은 두 가지로 나눠질까요?

2. 용서가 가져오는 심판

  성경은 바로 그 예수님의 때부터 심판이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요한복음 3:18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들은 모든 사람들의 죄를 위해 죽으셨는데, 왜 심판이 시작되는 것일까요?
  용서는 봐주기가 아닙니다. 두 사람 사이에서 용서가 벌어진다면, 어느 한 쪽은 잘못을 했고, 다른 한 쪽은 잘못을 당한 것입니다.
예컨데 두 사람이 소개팅을 했다고 생각해보세요. 이 사람은 무슨 일인지 목발을 집고서 까페로 들어오네요. 다리에 장애가 있는듯 합니다. 맞은 편에는 단정하게 차려입은 여성이 앉아 있습니다. 함께 대화를 나누는 도중에 그 남자가 앞에 앉은 여성분께 뜬금없이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당신을 용서할게요."[각주:1] 제 말을 듣고 여성분이 기분이 좋겠어요, 안좋겠어요? 아마 따귀를 맞을지도 모릅니다. 이렇듯 용서는 잘못한 사람에게 잘못을 당한 사람이 하는게 용서에요. 제가 여러분들에게 용서한다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저에게 뭔가 잘못한 일이 있는 것이겠지요. 만일 여러분이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제가 용서한다고 말하면 제가 이상한 사람이겠지요?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고, 부활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이 소식을 전해들었어요. 즉 하나님께서 인류의 모든 죄를 예수님의 몸에 고정시켰고, 예수님은 그 모든 죄를 끌어안고 기꺼이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삼일만에 그 예수를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모든 사람, 심지어 그 이전에 죽었던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고, 가장 먼저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 이야기는 온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의 소식이었어요.

  이 온 인류에 대한 예수님의 용서 소식을 듣고 어떤 이들은 자신이 잘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뉘우쳐요. 하나님이 "내가 내 아들 예수 안에서 너를 용서했단다"라고 말했을 때, 누군가는 "하나님 제가 잘못했어요. 감사해요"라고 고백하고 뉘우칩니다. 그리고 자신이 잘못했던 것을 고쳐나가는 새로운 삶을 삽니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아까 소개팅 여성처럼, "나를 용서했다고? 내가 뭘 잘못했기에?" 라며 의아해하는 경우입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잘못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용서도 필요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상상해보세요. 아까 소개팅했던 여성분이 사실은 10년 전에 교통사고를 내서 그 남자를 쳤습니다. 남자는 쓰러졌지만, 자신을 치고 그저 달아나는 차의 운전석에서 얼굴을 보고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소개팅에서 그 여자를 만나자 대번에 그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 것이지요. "제가 당신을 용서할게요." 만일 이 여자가 자신이 정말 잘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남자 앞에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만일 이 남자의 용서 앞에서도 뻔뻔하게 자신의 잘못을 감추고 있다면, 이 사람은 이미 심판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현실 속에서 뉘우치지 않음으로 드러나요. 이렇게 정리해둡시다.

  심판 : 뉘우치지 않음(현실) -

3. Q. 내가 하나님께 무슨 죄를 지었나요?
   A. '이웃'을 '사랑'하고 있나요?


  사람은 날마다 하나님께 잘못을 쌓아가는 '가해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창조하지 않으셨는데도,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를 거스르는 반창조의 삶을 고집합니다. 반창조(Anti-Creation)는 우리가 '사탄'이란 말의 뜻이라고 배웠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자신의 뜻에 불순종하는 반창조의 인류를 먼저 용서하셨습니다. 반창조의 인류에게 용서를 할지 말지 물어보지 않으셨어요. 하나님은 먼저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용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잘못이 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즉 예수님 죽으셨던 것에 모든 인류는 책임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에요.

  "2000년전 죽었던 예수의 죽음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어?" 라고 누군가는 반문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상관 있어요. 예수는 잘못이 없는데도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많은 사람들이 원했고, 또는 그저 지켜봤습니다. 단 한 사람이라도 십자가 지고 가는 예수를 가로막고, "이 억울한 사람을 죽여선 안돼요!" 라고 했던 사람 있었습니까? 단 한 사람이라도 부당하게 채찍질 당하는 예수를 보며 이것은 잘못되었다고 소리친 사람이 있었습니까? 제자들은 모조리 도망가고, 다들 예수의 죽음을 구경하러 나왔지, 말리러 나오지 않았잖아요. 모두의 배신속에, 모두의 눈감아줌 속에, 죄 없는 예수는 그렇게 죽임당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에요.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들은 우리 주변에 정말 많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에게는 '이웃'이 필요해요. 힘께 목소리를 내주고, 그 억울한 사람의 마음을 돌봐주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우리 주변에 억울한 일을 당했는데, 우리가 그저 구경만했다면, 구약성경 내내 "이웃사랑"을 말씀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책임을 물으실거에요. "너, 네 이웃이 힘들 때 아무렇지도 않았니?"

  우리에겐 죄가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은 죄에요. 이 죄에 모든 사람이 걸려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물었습니다. "대체 누가 우리의 이웃입니까?"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가장 끔찍이도 싫어하는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말씀하셨어요. 모든 사람이 부활하니까 모든 사람이 이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모든 사람의 부활을 가져왔다면, 우리의 이웃 아닌 사람은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물이 벌인 반창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 이웃사랑의 죄에 대해서 먼저 용서하셨어요.

4. '뉘우침'은 하나님의 용서택배를 열어보기

  스가랴 12:10에 보면 예수를 찔러 죽인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예수를 죽인 죄인들이지만, 자신 때문에 예수가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고서 자기 아들을 잃은 사람처럼 슬피 눈물 흘리는 사람들입니다. 스가랴는 이 사람을이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는 영을 받은 사람들, 뉘우치는 영을 받은 사람들이라 말합니다.

스가랴 12:10
그러나 내가, 다윗 집안과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구하는 영'과 '용서를 비는 영'을 부어 주겠다. 그러면 그들은, 나 곧 그들이 찔러 죽인 그를 바라보고서, 외아들을 잃고 슬피 울듯이 슬피 울며, 맏아들을 잃고 슬퍼하듯이 슬퍼할 것이다.


  하나님의 용서가 모든 사람에게 이뤄졌지만, 누군가는 그 용서에 뉘우침으로 반응하고, 누군가는 그 용서가 필요없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하나님의 용서는 마치 택배와도 같습니다.[각주:2] 하나님은 가장 소중한 자기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셨어요. 바로 용서의 택배에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용서의 선물을 거저 주셨습니다. 이 선물은 인류 모두에게 한 사람도 빠짐없이 보내졌습니다.

  문제는 이 택배를 열어보는 사람이 있고, 열어보지 않는 사람이 있을 뿐이에요. 열어봄이 바로 뉘우침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알게 된 사람들이에요. 흔히 대중가요에 보면, 연인과 헤어지고서 부르는 이런 가사가 있잖아요.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그런데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시간은 되돌릴 수가 없어요. 하지만 시간을 되돌리는 것보다 더 좋은 길이 있습니다. 바로 '용서-뉘우침'의 길이에요. 하나님과 우리 사이, 그리고 우리와 이웃 사이에도, 이 '용서-뉘우침'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보다 좋은 길은 없어요. 용서하고 뉘우치면 그 안에 잘못은 눈 녹듯 사라집니다. 용서하고 뉘우치는 게 빛이에요. 그 속에 어둠이 있을 수 없습니다. 잘못을 안하려고 조심조심 살아도 사람은 잘못합니다. 그러나 잘못을 없앨 수 있어요. 용서하고 뉘우치면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서 잘못은 사라집니다. 물론 단번에 되지 않고, 오랜 시간과 오랜 노력이 걸릴 수도 있어요. 그러나 우리는 어렵더라도 용서-뉘우침으로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택배를 열어본 에클레시아니까요.

  하나님의 용서 택배가 그 사람에게 분명 보내졌는데, 그래서 이 사람이 뉘우치기만 하면 하나님과 다시 하나되어 새롭게 살 수 있는데, 이 하나님의 택배를 거절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뉘우치지도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용서도 모릅니다. 그래서 뭔가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잘못했을 때 1) 그 잘못을 숨기거나 2) 다른 것으로 감추거나 3) 다른 사람 탓을 합니다. 잘못이 자신에게 있다고 진심으로 뉘우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아요. 타락한 사람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잘못을 저질렀을 때, 사람은 풀숲에 숨고, 무화과나무로 가려보고, 남에게 책임을 떠넘기기 바빴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잘못을 뉘우칠 줄 몰랐어요. 하나님은 정작 그걸 바라셨는데도 말이에요.

  예수님의 부활, 그리고 모두의 부활. 이 사이는 바로 '자비의 시대'입니다. 저는 이 시대를 "있을 때 잘해!"의 시대라 부르고 싶어요. (자비가) 있을 때 잘 해야합니다. 하나님의 택배를 끌러볼 수 있는 시대에요. 

5. 피해자 하나님이 드러나시는 날,
-떳떳한 날일까, 부끄러움의 날일까!

  사람들이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면 믿을 수 있을 것 아니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왜 자신을 안보이게 하실까 생각하니, 아직 뉘우칠 사람들이 남아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듭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런데 정말 뉘우치고 싶지 않아요. 그럼 그 사람 만나는게 껄끄러워지고 피하고 싶은 일이 될거에요. 하나님을 만나고 싶은 사람은 뉘우치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뉘우치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일만큼 꺼려지는 일도 없겠지요. 하나님이 다시 나타나셨는데, 그때도 숨고 가리고 책임을 떠넘기는 사람들이 있을 거에요. 그 사람들은 뉘우치지 않은 사람들, 하나님의 택배를 받아서 열어보지 않안 사람들, 자신이 예수의 죽음에 잘못이 있다는 것을 부정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끝까지 타락한 아담과 하와처럼 살았음이 드러날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의 다시 나타나시는 날은 정말로 수치스러운 날이 될거에요. 이것이 심판의 부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까 정리한 도식을 이렇게 마무리 할 수 있어요.

  -심판 : 뉘우치지 않음(현실) - 수치스러운 부활(심판의 부활)

  대신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사람에게는 이미 하나님의 용서가 이뤄졌습니다. 뉘우쳐서 용서가 이뤄진게 아니고요. 이미 용서가 이뤄진 것을 그 사람들이 뉘우침으로 받응한 것이지요. 뉘우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잘못을 더이상 묻지 않으십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셨을 때, 하나님 앞에서 숨지 않고, 가리지 않을 사람입니다. 당연히 다른 사람을 탓할 일도 없는 사람입니다. 뉘우치면, 하나님 앞에서 떳떳한 아들 딸입니다. 뉘우치는 아들, 딸들에게 아버지는 죄를 더 이상 묻지 않으세요. 뉘우친 사람들에게 최후의 심판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해자-피해자의 관계가 아니라, 사랑하는 가족의 관계임이 드러나는 기쁨의 날입니다.

  그리고 이 최후의 심판에서 떳떳한 사람들은, 현실 속에서도 다른 사람에게도 용서할 수 있는 넉넉한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께 뉘우쳐서 새롭게 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뉘우침을 기대하며 현실을 살아갑니다. 그 뉘우침으로 그 사람들도 새롭게 되기를 바라면서 말이에요.

  그래서 오는시대는 용서의 바다에요. 이미 하나님의 용서는 이뤄졌습니다. 이 용서에 바다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아가미가 택배로 도착했습니다. 즐겁게 수영하며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며 살려면, 어서 택배를 풀어보세요. 잘못을 떠넘기지 말고, 뉘우치세요. 사람에게 뉘우치고, 하나님께 뉘우치는 것이야 말로, 가해자-피해자의 관계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이로 들어가는 좁은 입구, 그러나 분명히 열려있는 오는시대의 입구입니다.


  1. 이 소개팅 상황은 미로슬라브 볼프의 <베풂과 용서> 5장에 등장합니다. [본문으로]
  2. 이 비유도 미로슬라브 볼프의 <베품과 용서> 5장에서 도움을 받았습니다. [본문으로]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