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내용과 관련이 있으므로 우선 재생부터!



첫번째 편지 : 이야기 속으로!

  지현자매 안녕하세요? 앞으로 매주 기독교 세계관 편지를, 그리고 매일 성경 해설 편지를 드립니다. 편지는 인격과 인격이 글을 통해 만나는 기가 막힌 장르입니다. 이런 면에서 신약성서의 대부분이 편지라는 사실은 정말 소름돋는 일이지요. 암튼 씁니다. 복음편지. 복음에 대한 관심이 지현 자매의 삶을 온통 바꾸어놓기를 기대하며^^ 그럼 시작합니다.


1.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


  간단한 사실부터 짚고 넘어갑시다. 요새는 '믿음'이라는 말을 쓰면 대뜸 종교를 떠올리기 때문에, 믿음에 관해 말하는게 점점 곤란해졌습니다. 하지만 '믿음'은 종교에서만 쓰이는 말이 아니라, 사람이기 때문에 쓰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무언가를 믿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에요.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아이가 우쿨렐레를 잘 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생각 하나를 가지고 여러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어요. 먼저는 믿음입니다. 이 아이는 무엇을 믿고 있을까요? '우쿨렐레를 연습하면 연주를 잘하게 된다'는 것을 믿고 있을겁니다. 이 믿음은 어디서 생겼을까요? 아마도 우쿨렐레를 연습해서 좋은 실력을 얻은 이전의 사람들을 보거나 들었을 거에요. 누군가의 연주 동영상을 보게 되었는지도 몰라요. 하여간 잘 칠줄은 모르지만, 연습하면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전혀 칠 줄 모름!


  그런데 믿는다고 해서 우쿨렐레를 연주하고픈 생각이 드는건 아니잖아요? 저 역시 우쿨렐레를 열심히 연습하면 실력이 늘 것이라는 사실은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쿨렐레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필요한 것은 '바람'이에요.  믿음은 '우쿨렐레를 연습하면 연주를 잘하게 된다'는 생각이었는데, 이 말 앞에다  '내가'라는 말을 붙이고, 뒤에 '될거야'라는 말을 붙이면, 미래 소망이 됩니다. '내가 우쿨크렐레를 연습해서 연주를 잘하고 싶다'

  그럼 이 아이는 이제 무엇을 할까요? 
우크렐레 연습을 하면 연주를 잘하게 된다는 것을 믿고 있고, 
자신도 우쿨렐레 연습을 해서 연주를 잘하게 될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럼 이 아이의 현재는? 우쿨렐레를 열심히 연습하는 현재겠지요.

  이것은 사람의 과거-현재-미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믿음은 과거에요. 과거에 일어난 일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이건 그 사람이 속한 문화와 전통에 영향을 받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소망은 미래입니다. 그 과거의 일이 나에게도 일어나길 바라는 것이 소망이에요.
  그리고 이 믿음과 소망이 이 사람의 현재의 앞 뒤에서 끌어주고 밀어주며 현재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제대로된 과거를 믿고, 제대로된 것을 바라고 있다면, 제대로된 사람의 현재는 사랑입니다.

  다시 예를 든다면, 수험생의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어요. 
만약 수험생이라면, 대학 잘 가서 성공했다는 과거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믿고 있을 것이고,
그래서 자신도 그 과거의 사람들 처럼 대학 잘 가서 성공하는 것을 바랄 것이고,
그래서 지금 책상 앞에서 수능을 준비하고 있을겁니다.

  그럼 우리네 인생에도 다음 세가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 당신은 무엇을 믿고 있는가?
  • 당신은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 
  • 그래서 현재 무엇을 하고 있는가?

2. 세계라는 공간

  대답할 것이 없다면, 참으로 위기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 질문을 회피합니다. 혹은, 자신이 믿고 있는 바를 잘 모른채 무언가를 믿고 있거나요. 자신이 태어나서 속해버린 문화를 비판없이 받아들이기 때문이에요. 이게 그 사람의 믿음이 되어버립니다. 이걸 '전통'이라 부르던, '문화'라 부르던 그렇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전통에서 태어난 사람은 기독교를 진리로 믿고, 불교 전통에서 태어난 사람은 불교를 진리라 믿지요. 그저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된다는 이상한 전통에서 태어난 사람은 공부가 나를 살려줄 무언가로 믿어질겁니다. 왜 믿느냐고 물으면 이유는 알 수 없을거에요. 말 그대로 그냥 믿습니다.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은 미국문화에 팔이 굽고,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은 한국문화가 옳다 여기는 것도 똑같습니다. 세상을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곰돌이는 지금 왜 책을 읽고 있을까? 
과거에 믿는바와, 미래에 바라는바가 있어서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사는 좁은 공간에서 보고 들은 것을 가지고 렌즈를 만듭니다. 이 렌즈에는 믿음과 소망이 들어 있어서, 내가 현실을 어떻게 보는지를 결정하게 하는 렌즈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세상을 봐요. 누구나 그렇습니다. 근데 문제는, 그 렌즈가 너무 좁아요. 내가 보고 들은 것만 가지고 렌즈를 만드니까, 세계를 보는 정직한 렌즈가 안되고, 자꾸 내 것만 보이고, 우리 편만 보이는 렌즈들을 쓰고 잘못된 줄 모릅니다. 그러다가 서로 싸우는 일도 발생하죠. 이게 다 잘못된 안경을 써서 뵈는게 없어서 그런겁니다.

  하고 싸우니까 요즘은 기가 막힌 절충점을 찾았더라고요. "우리는 서로 틀린게 아니라, 다른거야. 니 말도 맞고, 내 말도 맞는거야." 이렇게 말하는게 흔해졌습니다. 문화도, 종교도, 생각도, 사람들은 서로 싸우기 싫으니까 저렇게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저게 정말 맞는걸까요? 누군가는 사과를 좋아하고, 저는 귤을 좋아할 수 있지요. 이런 경우는 그 사람 생각도 맞고, 제 생각도 맞다 할 수 있을테지만, 우리 아버지가 윤경호씨인데, 누군가가 "당신 아버지는 윤경호씨가 아니요"라고 하면, 이걸 당신도 맞고, 나도 맞소 할 수 있을까요? 그러다 누군가가 얻어 맞지 않겠습니까? 꾸란은 예수의 엄마가 미리암이라고 하고, 성경은 마리아라고 하는데, 이 두 책을 다 맞다고 쳐주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일까요?

  너도 맞고, 나도 맞다고 해서, 진리를 여러 개로 쪼갤 것이 아니라, 너와 내가 함께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하나의 진리를 찾아나서야 해요. 세상 전체를 제대로 볼 수 있는 렌즈가 필요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그걸 찾기 위해선, 내 생각만 고집해선 안되겠지요. 자신을 넘어서 훨씬 넓게 봐야겠지요. 나만 봐도 안되고, 우리 동네만 봐도 안되고, 자기 나라만 봐도 안되고, 세계 전체를 봐야하겠지요. 그래서 이 세계를 보는, 누구나 옳다고 인정할 수 있는 렌즈로 세상을 다시 들여다 봐야겠지요. 이 렌즈를 가리켜 전문 용어로 이렇게 부릅니다. 세계관.

  그런데 세상에는 다양한 세계관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되지 못한 세계관은 결국 배신하게 될겁니다. 대학이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 믿고 바라며 준비했던 사람이 결국 불행해진다면,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어요? 또한 자신이 무엇을 믿는지도 모르고, 무엇을 바라는지도 모르는 사람은 얼마나 더더욱 안타까운 일이겠어요? 당연히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있을테니 말입니다. 결론은 이겁니다. 제대로 된 관점으로 세상을 보자!

  그런데 세상 전체를 올바르게 보는 관점. 그런데 세상에 정말 그런게 있을까요? 



어떻게 보이냐보다, 어떤 생각을 가지고 세상을 보느냐가 더 중요해요. 
세상은 생각하는대로 보이니까요.


  '있다' 말해줘도 다들 잘 안믿더라고요. 왜냐하면 이미 쓰고 있는 렌즈가 있고, 그것을 '무조건' 긍정하고 싶은 게 인간이기 때문이겠지요. 그래서 이 새로운 렌즈를 받아들이는 것이 힘들수도 있습니다.(또 어떤 사람들은 쉽게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힘들든지 어쩌든지 간에, 사람은 이 새로운 렌즈를 꼭 망막에 이식해야 합니다. 믿어지지 않더라도, 믿겠다고 달려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밝히 보이는 진짜 세상을 비로소 만나게 될테니까 말입니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 이 렌즈는 꼭 필요합니다. 달려들고 쓰면 보입니다. 안보일리 없습니다. 하나님이 다 보이게끔 하셨습니다.


3. 시간 + 공간 = 이야기

  우리는 이제 마지막 문단에 이르렀습니다. 우리가 처음 얘기한 것은 '시간'이었어요. 한 사람을 둘러싼 과거와 미래가, 그 사람의 현재를 규정한다는 얘기. 그 다음에 얘기했던 것은, 공간이었어요. 나를 넘어서 세상 전체를 제대로 바라보게 하는 '세계관'이 필요하다. 이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과, 세계라는 공간을 합치면 무엇이 될까요? 

  바로 '이야기'입니다. 세계라는 무대위에서 시간의 순서를 따라 세상을 어떻게 보았는지 풀어낸 것이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야기가 엄청 중요합니다. 세계관이 이야기를 통해 전해지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어떤 이야기 속에서 살고 있느냐가, 나를 결정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모인 모든 곳에는 언제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세상을 읽었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고, 시간의 순서에 따라 진행되겠지요. 그리고 이 이야기 속에서 사람들은 삽니다.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보고, 연극을 보고, 연예인들의 가짜 결혼 이야기를 즐겨 보는 것은 이 때문이에요.  그 이야기가 그 사람의 믿는 바를 제공하고, 바랄 바를 제공합니다. 세계를 이야기로 읽습니다. 이것 없이는 사람이 살 수 없기 때문에, 사람은 이야기에 붙어요. 모두모두 붙어요.


모두를 하나되게 하는 이야기에!


  그럼 이제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지요. 

   "그렇다면, 어떤 이야기 속에서 살 것인가?" 

  아까 했던 질문이 기억납니까?
  • 당신은 무엇을 믿고 있는가?
  • 당신은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 
  • 그래서 현재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 질문이 과거-현재-미래에 대한 질문이기에, 이렇게 바꿀 수도 있습니다.

  • 당신은 어디서부터 왔는가?
  • 당신은 누구인가?
  • 당신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사실 이 세 가지 질문은 제가 만든 질문이 아니라, 고갱이라는 화가의 그림 제목입니다.

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


  이 질문에 답을 주는 이야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 속에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나만 행복하거나, 우리만 행복한거 아니라, 모든 사람이 이 이야기 속에서 행복할 수 있다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저 질문들에 답을 할 수 없고, 특정 부류의 사람들만 행복한 이야기라면, 그건 좋은 이야기가 아닐거에요. 만약 우리가 그러한 이야기 안에 있음을 깨닫는다면, 깨닫는 즉시 그 이야기 속에서 탈출해야 할 것입니다.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가지고 사는지도 모르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무슨 이야기를 가지고 사는지 알뿐만 아니라, 그 이야기가 세상을 바라보는 참 이야기라고 서슴없이 주장하는 사람들이 되라는 말입니다.

  그 이야기가 바로 성서 이야기입니다. 성서의 이야기가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참 이야기라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저는 이런 저런 이야기 많이 좋아합니다. 우파니샤드도 좋아하고, 바가바드 기타도 좋아하고, 반야심경도 좋아합니다. 하지만, 중심 줄기가 되는 이야기는 성서뿐이에요. 신화도 아닌, 주문도 아닌, 역사 위에서 인간의 시작과 끝을 기록한 책은 성서 밖에 없으니까요. 그래서 성서는 가운데에요. 중심이에요. 우리가 세상을 올바르게 보게 하는 단 하나의 이야기! 우리의 시작과 끝을 밝혀줄 신의 선물, 그 안에 우리가 함께 믿을 과거와 함께 바랄 미래가 기록되어 있어요.

  그러니 이 이야기에 들어와요. 오세요 오세요. 사람을 배신하지 않는 참 이야기 속으로.



2014년 5월
하나를 알고, 여럿을 알아, 진정 나를 알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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