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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 3:10~17, 개인번역


그런데 바로 네가 내 곁에서 따랐다, 

이 가르침으로, 이 이끔으로, 이 앞에놓음으로, 

이 신실함으로, 이 긴 호흡으로, 이 인(仁)으로, 이 견딤으로,

이 추격당함들로, 이 겪음들로

(나에게 안티오케이아와 이코니아와 아우스트라에서 있었던 것과 같은).


이러한 류의 추격들을 나는 이미 당했고,

모든 것들로부터 주는 나를 건지셨다.

그런데 메시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삶을 욕망하는 모든 이들도

추격을 당해 달아날 것이다.


그런데 악하고 속이는 이들이 더 나쁜 정도로 커질 것이다,

어그러지고 어그러짐을 당하며(속고 속이며).


그런데 너는 네가 배우고 신뢰가 생긴 것들 안에 머물라,

네가 어떤 사람들 곁에서 배웠는지를 너는 이미 알고 있다,

왜냐하면 너는 태아(βρέφος) 때 부터 거룩한 기록들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기록들은 너를 메시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함을 통해서 

구원 속으로 지혜롭게 할 수 있는 것들이다).


각/모든 기록은 하나님의 숨결로 된 것이고 

가르침을 위한 쓸모가 있는 것이니,

근거를 향하고, 다시 곧게함을 향하고, 의 안에서 양육을 향하며, 

이는 그 님의 사람을 적합하게 하기 위함이다, 

이미 날이 채워진(ἐξηρτισμένος) 모든 선한 노동을 향하여.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합니다. "바로 네가 지금까지 나를 따라왔다." 이 길은 '제자도'입니다. 디모데가 스승 바울을 부지런히 따라갔던 제자의 길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의 선두에는 스승 중에 스승이신 메시아가 계신 길입니다. 이 제자도의 행군이 2000년 동안 이어졌고, 우리는 그 맨 끄트머리를 따라가고 있는 중입니다. 바울은 이 제자도의 길을 다양한 이름으로 언급합니다. 10절에 나와있습니다. "나의 교훈, 나의 행실, 나의 의향, 나의 믿음, 나의 오래 참음, 나의 사랑, 나의 인내". 이 멋진 말들의 갯수를 세어 보면 바울은 총 일곱 개의 이름으로 자신과 디모데가 걷는 이 제자의 길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이 일곱이란 숫자는 예사 숫자가 아닙니다. 일곱은 '온전함'을 의미합니다. 즉 일곱 번 언급된 이 길은 온전한 길입니다. 온전한 제자가 되는, 예수께서 앞서 놓으신 곧은 길입니다. 이 일곱 차례 언급된 단어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다 멋있는 말들이고, 들어도 하나도 기분 나쁠 것 없는 것들입니다. 이 일곱개의 단어들이 빛내는 제자도의 길은 정말 값집니다.


  그런데 만일 바울이 여기서 편지를 그쳤다면, 편지를 쓰는 바울도 기분 나쁠 것 없고, 디모데도 부담스럽지 않을 것인데, 바울은 뒤에 두 가지를 더 추가합니다. 그런데 추가 되는 두 단어는 별로 달갑지 않고 참으로 부담스럽습니다. 그러나 제자도의 길이 온전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관통해야 하는 두 가지입니다. 우리가 가진 개역개정 성경은 이 두 가지를 "박해 받음과 고난"이라 번역했습니다. 이때 박해 받음은 원문으로는 "추격 당함"입니다. 즉 기독교에 반대하는 사람들에 의해 쫓김을 당하여 자기 자리를 억지로 떠밀려 떠나야 하는 비참한 상황을 가리키는 것이 박해입니다. 예전 번역에서는 이것을 "핍박"이라 번역했습니다. 


  그리고 "고난"이라 번역되는 단어의 원래 뜻은 '겪음'입니다. 그런데 이 겪음이 쉽지 않으니 '고난'이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정리해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따르는 제자도의 길은 온전한 길입니다. 이 길을 곧게 걸으면 우리는 온전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길에는 우리를 반대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고, 우리는 그들에 의해 어려움을 겪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일곱 개의 좋은 말에 대해서는 부연 설명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에 대해서는 길게 설명이 이어집니다. 그러니 우리가 제자도에 있어서 "박해와 고난"을 제외하고, 일곱 가지 좋은 단어들만 가지고 말한다면, 그것은 제자도의 본질을 놓친 것이 될 것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먼저 겪었어. 그런데 모든 추격들로부터 주님은 나를 건지셨어." 우리는 바울의 이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압니다. 사도행전은 온통 반대파 사람들에 의해 추격당하는 바울의 사건들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바울만의 이야기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어지는 다음 12절 때문입니다.


디모데후서 3:12, 개역개정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여러분이 예수를 믿어 온전한 생활을 하고자 합니다. 이것이야 말로 우리가 이 새벽에 모인 이유입니다.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온전한 생활함이 두 글자로 '겅건'임을 우리는 어제 확인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통치되는 온전한 일상이 곧 경건입니다. 거친 파도 속에서도 그 파도를 뚫고 나아가는 일상 속에서 발휘되는 능력이 경건입니다. 종교생활은 그것의 외피일 뿐, 그 외피 안에는 일상을 새롭게 하려는 성도의 분투로 약동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경건은 반드시 반대파를 낳습니다. 그리고 어려움을 가져옵니다. 이것이 사랑하는 디모데에게 전하는, 바울이 몸소 겪은 진실입니다.


  혹시 예수의 뜻을 따르는 것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계신 분이 계십니까? 기뻐하셔야 합니다. 지금 제대로 걷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기어코 당신의 몸과 맘을 불편하게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을 바꾸어놓기 위함입니다. 몸과 맘이 편한 자리에서 '변화'는 이뤄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을 고쳐놓고 바꿔놓고 온전케 하시리고 작정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왜 당신을 바꾸려고 하십니까? 당신과 하나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될 때 하나님이 달라지셔야 하겠습니까, 우리 자신이 달라져야 하겠습니까? 그러니 상황에 대한,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투정은 버려야 합니다. 온전해지는 길은, 하나님이 바뀌지 않고 내가 바뀌어야 하는 길이기 때문이고, 이것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경건에 하나님 주시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 불편함마저도 뚫고 사랑의 일상을 피워낼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그것을 당신과 함께 하고자 하십니다. 그러니 우리의 박해와 고난은, 우리의 기쁨입니다.


  만일 예수를 믿음에도 불구하고 몸과 맘이 편하기만 한 사람이 있다면, 지금 괜찮은지를 걱정스럽게 물어봐야 합니다. 물론 잠시간 그럴 수 있지만, 줄곧 그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필요한 게 있으니, "한 걸음"입니다. 편한 자리에 안주하지 말고, 스스로 더욱 그리스도인답게 몸을 내미는 일이 필요합니다. 어려워질 것 같은 상황으로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선언하며 전진하셔야 합니다. 세상 모두가 편하기를 원하는데, 그와 반대로 성도는 불편함을 자처하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세상이 불편해하는 진실을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된 하나님의 소식, 죽음을 이긴 생명의 진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이 불편한 진실을 붙들었으니, 우리보다 먼저 세상이 우리를 불편해 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우리의 경건, 그 경건에 반대하는 사람, 그로부터 생기는 고난, 그런데 그 고난을 견뎌냄.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양육하시는 방식입니다. 아주 오래된 전통있는 교육방법입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바울도 양육을 받았고, 베드로도 양육을 받았고,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이 양육을 받았습니다. 그 중 야고보 사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고보서 1장 2절과 3절에 보면,


야고보서 1:2,3, 개역개정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그러니 이 온전한 제자도의 길 위에서, 경건의 매일을 살아가는 인생 속에서, 참고 견디시기 바랍니다. 물론 참고 견디는 것이 몸서리칠 만큼 힘들고, 하나님이 매섭게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겪는 어려움이 큰 만큼, 우리가 자랍니다. 나무가 세월의 풍파를 맞은 만큼 나이테가 늘어나듯, 우리의 고난은 덧없는 고생이 아닙니다. 이것은 용광로 안에서 불순물이 소멸되는 과정이고, 원석에 오래 붙어있던 가치없는 것들을 예리한 절단기로 깍아내는 과정입니다. 그러니 아파야 합니다. 만일 자신에게는 박해와 고난이 없다는 성도가 있다면, 그리고 바울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는 몹시 걱정된 표정으로 그 성도에게 물었을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양육을 받고 있는 것이오, 아니오?'


  경건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미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인 자들입니다. 그들은 악하고, 속이며, 그 상태가 점점 더 심각해집니다. 남들을 속이는 그들은 실로 사탄에게 속은 이들인데, 그 사실을 모르고 서로에 의해 속고 속임을 반복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걷는 걸음은 갈지(之)자요, 사람을 온전케하는 제자도의 곧은 길을 걸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걷는 길과 우리가 걷는 길은 다릅니다. 섞일 수 없습니다. 사망과 생명은 같이 있어도 하나되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미에, 15절에서 17절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성경을 권합니다. 박해와 고난을 뚫고 경건을 얻으려는 이에게 바로 이 책이 큰 위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두 가지 점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15절에 보면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라고 되어있지만, 원문에는 "네가 엄마 뱃속의 태아일 때부터 알았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시편 8장 2절 말씀에 하나님께서 젖먹이의 부드러운 입술로도 자신의 권능을 세우신다는 말씀처럼, 우리가 성경을 읽고 듣고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은 본래부터 이 진리를 알고 있었고, 그는 세상에 없던 새로운 것을 깨달은 것이 아니라, 본래 있었던 진리로 돌아온 것입니다. 진리는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부터 있었고, 오히려 그 진리가 세상을 창조했습니다. 진리에게는 만고불변이란 말도 부질없습니다. 진리는 영원불변입니다. 그리고 이 성경의 목적의 목적에 관해 17절이 보여줍니다.


디모데후서 3: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이 구절은 디모데후서 이야기를 적절하게 요약합니다. 하나님은 두 가지 목적 때문에 성경을 주셨습니다. 첫 번째 목적은 우리가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즉 경건을 사는 것입니다. 일상이 달라지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첫 번째 목적만큼이나 중요한 두 번째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을 닮은 선한 노동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박해와 고난은 이 과정의 작은 일부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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