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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 3:1~9, 개인번역

그런데 이것을 깨달아라,
끝 날들 안에서 힘겨운 때들이 이를 것이다.
즉 사람들이 이기적이고, 돈을 사랑하며, 허풍 떨고,
과시하며, 비방할 것이고, 부모들에게 설득되지 않으며,
감사를 모르고, 불경하고, 애정없고,
약속을 깨고, 이간질하며, 성질내고, 난폭하고,
선을 사랑하지 않고, 배신하며, 앞만 보고,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기고,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쾌락을 사랑하며,
경건의 형태는 가졌으나 그것의 잠재력을 부인하는 자들이 될 것이다.
그리고 너는 이런 사람들을 피하라.

왜냐하면 그들 중에는 집 안으로 들어가
비뚤어짐들을 쌓아두었던 소녀들을 납치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 여자들은 다양한 욕망들로 이끌려
언제나 배우지만 결코 참의 깨달음 속에 이를 수 없다,
그런데 이안네스와 이암브레스가 모세에게 맞선 방식으로,
이와같이 이 사람들도 이 참에 맞선다,
그 생각이 썩은 사람들이고, 이 신실함에 관하여 입증될 수 없는 이들이다.
오히려 그들은 더 커질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무지가 모든 면에서 분명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그들 자신에게 속한 무지가 지금 존재하듯이.



  남들이 듣기에 기분 좋은 소리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정말 어려운 것은 남들이 듣기 싫은 소리를 하는 것이고, 우리가 정말 잘 해야 하는 말이 있다면, 바로 이러한 말입니다. 듣기 싫은 말을 잘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삶을 바꾸는 것은 듣기 좋은 말이 아니라, 듣기 싫은 말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운을 뗍니다. "그런데 이것을 깨달아야 한다. 말세에 고통하는 시간들이 이를 것이다" 이때 '말세'는 흔히 미래라고 생각하지만, 신약성경 어디에도 말세를 미래로 기록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을 때, 이미 말세가 시작된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이미 말세를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 말세가 도래할테니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 사이비요 이단입니다. 이 땅에 마지막 때를 시작하신 그리스도의 거룩한 사역을 왜곡하는 이들이니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이 마지막 때의 현상에 대해서 말합니다. 마지막 때에는 사람들이 이기적이 되고, 돈을 사랑하며, 허풍을 떨고, 과시하며, 비방하며, 부모에게 설득되지 않으며, 감사를 모르고, 불경하며, 애정이 없고, 약속을 깨고, 이간질하고, 성질내고, 난폭하고, 선을 사랑하지 않고, 배신하며, 앞만 보고,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기며,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쾌락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삶과 정반대의 삶을 가리켜 성경은 두 글자로 말합니다. '경건'. 


  경건이라는 말은 앞에서 바울이 말했던 말세의 타락한 사람들의 경우를 모두 뒤집으면 경건입니다. 즉 이타적이 되고, 돈을 사랑하지 않으며, 허풍을 떨지 않고, 과시하지 않고, 비방하지 않고, 부모에게 설득되며, 감사를 알고, 거룩하게 살며, 애정이 넘치고, 약속을 잘 지키고, 다른 사람 뒷담화를 하지 않으며, 성질을 죽이고, 온유하게, 선을 사랑하며, 배신하지 않고, 앞만 보지 않으며, 스스로 낮출 줄 알고, 쾌락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경건입니다. 즉 경건은 온전한 인간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인간성이 곧 경건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로 이렇게 사는 것에 능력이 있다는 것을, 온전한 인간성으로 살아가는 것에 힘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경건입니다. 하나님이 아무 것도 아닌 사람들이, 날마다 일상속에서 온전한 인간성으로 살고자 애쓸 때, 그 사람들을 통해 이 땅에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 경건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의 일상이 중요하고, 오늘 우리의 온전한 일상을 위한 애씀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힘입어 사랑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경고합니다. 가짜 경건이 있다. 이 가짜 경건은 온전한 일상을 사는 것에 능력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면서도, 종교활동에 열심을 내는 것이 가짜 경건이요, 껍데기 경건입니다. 껍데기는 있으나 그 속이 텅 비어있으므로 거짓이요, 사기입니다. 그러한 경건은 텅 빈 자신에 대한 포장에 지나지 않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합니다. 너는 이런 사람들을 피하라. 바울은 이런 사람들을 설득하고 도와주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성도는 이런 사람들과 상종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이런 사람들이, 자신과 교회가 다르다는 것을 인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와 세상과의 다름. 절대 하나될 수 없음이 강조될 때 교회도 살고, 세상도 그 교회 덕분에 윤리 수준을 유지합니다. 교회나 세상이나 별반 다를 게 없다면, 교회도 죽고 세상도 죽습니다.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올바른 것을 보여주는 사람들 없다면, 세상은 옳고 그름을 섞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경건의 능력은 곧 온전한 일상, 사랑하는 하루하루를 사는 능력입니다. 내가 나의 일상을 통제하고 다스리는 것이 경건입니다. 날마다 나를 쳐서 복종시키는 것이 경건입니다. 꾹 참고서 메시아의 왕노릇 하는 것이 경건입니다. 메시아가 참으셨기에 우리가 구원 얻었듯이, 우리가 참으면 세상이 구원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제 바울은 이러한 경건을 거절한 사람들의 참혹한 결과를 디모데에게 들려줍니다. 어떤 이들은 집안의 연약한 소녀들을 꾀어내어 그들의 욕망을 개방시켰습니다. 그래서 다시 올바른 것을 배워도 배울 수 없는 처참한 상태를 만들어 버렸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이단입니다. 가가호호 문을 두드리고, 거리에서 사람들을 붙잡고 사람들의 고민과 약한 점을 건드려서 거짓을 가르치는 사람들 말입니다. 이런 사람들도 기도하고 예배 드립니다. 경건의 껍데기는 있습니다. 그러나 일상을 새롭게 하는 메시아 예수의 능력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뒤에 나오는 모세에게 대적했다는 얀네와 얌브레는 성경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다만 유대인들의 이야기로 전해지는 사람들인데, 이들은 출애굽기 시절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모세가 파라오 앞에서 하나님의 소식을 전하며 이런 저런 표적을 보여줄 때, 모세의 표적을 따라하며, 파라오가 모세에게 설득되지 못하도록 애썼던 사람들이 얀네와 얌브레입니다. 즉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지 못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믿지 않고 완고한 태도를 가진 이들을 ‘파라오’에 비유했습니다. 즉 믿지 않는 이들은 파라오들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파라오들에게 모세와 같이 구원의 사절단을 보내셨습니다. 그 사람들이 바로 우리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경건은 하나님의 능력이자, 세상을 향한 구원의 알림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파라오들에게 참된 소식이 전파되는 것을 막는 얀네와 얌브레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경건의 껍데기만 있으면, 뭔가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내용을 배우기만 하면 삶이 안정되고 괜찮아질 것이라 말하는 거짓말쟁이들입니다. 삶이란 안정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삶은 끊임없이 소용돌이 칠 것입니다. 삶 속에서 우리가 예측하지 못한 일이 벌어질 것이고, 우리는 미래에 대해 다 알지 못한 채 현실을 마주하게 될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어느 노래 가사처럼 “한 치 앞도 모두 몰라 다 안다면 재미없지”는 딱 맞는 말입니다. 


  경건은 그 소용돌이같은 삶 안에서 피어나는 사랑하는 삶입니다. 거친 파도 속에서도 온전한 일상을 구현하는 것입니다. 진흙 투성이의 늪지에서 연꽃이 피어나는 것이 경건이고, 삶의 불길보다 더 온도높은 사랑으로 사는 것이 경건입니다. 두 글자로 하면 부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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