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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 2:1~13, 개인번역


그러니 나의 아이야, 

네가 메시아 예수 안에 있는 거저 안에서 힙입어라


그리고 네가 내 곁에서 많은 증인들을 통해 들은 것들을, 

바로 그것들을 신실한 사람들 곁에 두어라

  그들이 다른 이들을 가르치는 데에도 강해질 것이야. 


함께 나쁜 것을 겪어라 마치 메시아 예수의 온전한 군대와 같이. 

  군사된 어떤 사람도 삶의 문제들에 결코 얽매이지 않아, 

  이는 그가 그 군대를 모으시는 이에게 맘이 맞아 기쁘기 위함이야.

그런데 만일 어떤 이가 경기를 한다 해도, 

그가 법적으로 경기하지 않는다면, 결코 월계관을 쓰지 못하지. 

고생한 농부가 그 열매들중 첫 것을 함께 취하는 것이 마땅해. 


내가 말한 것을 인지하라

왜냐하면 주께서 너에게 모든 것 안에서 '쉬네시스'를 주실 것이기 때문이야. 


죽은 이들로부터 일으켜진, 다윗의 씨로부터 (나신), 

나의 이 복음에 따른 메시아 예수를 기억하라

그이 안에서 내가 범죄자로 결박당하기 까지 나쁜 것을 겪었지만, 

오히려 그 하나님의 말씀은 묶여있지 않았어.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선택받은 사람들 때문에 모든 것을 버티고 있어, 

이는 이 사람들도 메시아 예수 안에 있는 그 구원을 

오는시대의 영광과 함께 만나게 하기 위함이야.


이 말은 신실하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함께 죽었다면, 우리도 함께 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야.

만일 우리가 함께 버텼다면, 우리도 함께 다스릴 것이기 때문이야.

만일 우리가 함께 부인할 것이라면, 바로 그분도 우리를 부인하실 거야.

만일 우리가 신실하지 않다면, 그이는 신실하게 남아계셔.

왜냐하면 그이는 자기 자신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야.



찬송가 150장. 갈보리 산 위에

  지금으로부터 2000년전, 젊은 목사에게 보내는 늙은 복음 전도자의 편지가 있습니다. 이 땅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처음으로 생겼고, 그 신생아같은 이들을 잘 돌볼 필요가 절실했을 때, 그들을 돌보는 최초의 목회자들 중에 한 사람이 바로 디모데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걱정과 기대를 담아 편지를 쓴 늙은 전도자는 바로 바울입니다.


  오늘 본문의 2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운을 땝니다. "나의 아이야." 우리가 가진 개역개정에는 "나의 아들아"로 되어 있지만, 원문에는 아들이 아니라 아이입니다. "나의 아이야"라고 읽으면 좀 더 친근한 맛이 더한 것 같습니다. 이 젊은 목회자 디모데도 처음 예수를 믿기 시작했을 때가 있었고, 그에게도 양육과 돌봄이 필요했습니다. 그 역할을 바울이 감당했습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에게 자신의 정성을 쏟은 이 사람은, 복음 안에서 자신의 제자된 사람에게 "나의 아이"라고 부르는데 지체함이 없습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이렇게 하라"를 찾아서 밑줄을 그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바울이 디모데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가 더 확연히 드러날 것입니다. 먼저는 1절에 나온대로입니다. "네가 메시아 예수 안에 있는 은혜로 힘입어라!"라고 말합니다. "강하다"라고 번역되었지만, 이것은 스스로 혼자 강해지라는 말이 아닙니다. 메시아에게 단단히 뿌리내려, 그 은혜로 힘입어 살라는 말입니다. 만일 그 은혜 없이 혼자 한려고 한다 한들 오래 가지 못하고 금세 지칠 것입니다. 나 말로 다른 사람을 의지하려고 해도, 그 사람을 언제까지 힘들게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영원하신 한 분에게서만이 양분이 끝없이 흘러나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그 폭발적인 생명력만이 우리가 힘입을 유일한 근원입니다. 


  그래서 저는 "힘내"라는 말 보다 "힘입어"라는 말이 좋습니다. 힘 빠진 사람에게 힘을 내라고 말해봐야, 그는 힘을 낼 수 없기에 힘든 것입니다. 그에게는 힘입으라고 조언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힘은 바로 메시아 예수의 은혜로부터만 흘러넘치는 것입니다. 그이가 고난 속에서도 사랑했다는 분명한 사실이, 우리를 다시금 작동시키고 사랑으로 움직이게 만들지 않습니까?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하는 두 번째 내용은 많은 증인들을 통해 들은 것을 사람들에게 잘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도 남들을 가르칠 수 있도록 만들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교회 교육의 핵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3절에 기록된대로 "고생을 함께 겪어라"입니다. 고난은 다른 게 아닙니다. "고생"입니다. 고생하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냐만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함께 고생하고 함께 이겨내라' 이 말을 지금 바울이 목회자에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과 함께 고생해야해. 그리고 함께 이겨내야 해.' 즉 성도들과 함께 고생하며 돈독해지는 것은 목회자의 기본 소양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비단 목회자 뿐입니까? 믿는 이들은 함께 고생하며 더욱 친밀해지는 사이입니다. 친밀해지다 못해 바울과 디모데처럼 가족이 되는 사이입니다. 바울은 이번에는 이것을 군인에 비유합니다. 화살이 빗발치는 전쟁터를 함께 겪으며 더욱 친밀해지는 군인처럼, 우리 동료 기독교인들과의 사랑은 전우애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홀로 전쟁터에 떨어졌다고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누가 날 여기에 데려다 놓았느냐'며 모든 것을 불평하고 원망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전우애로 뭉친 동료와 함께 있는 군인은, 그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고지 향해 달릴 용기가 생깁니다. 그리고 이 전쟁터로 우리 모두를 불러주신 분에 대한 충성만이, 자신들을 이기게 하고 살아남게 할 것을 굳게 믿습니다.


  믿지 않는 이들 중에서도 착하게 살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도덕적으로 살고 싶고, 깨끗하게 살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컨데 겸손을 생각해봅시다. 겸손해지고 싶다고 겸손해지는 법은 없습니다. 겸손해지려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교만한 자기 자신을 더욱 민감하게 발견할 뿐입니다. 따라서 겸손하고자 하는 이는 겸손을 잊어야 합니다. 그래야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해보이는 일입니다. 그러나 교회된 우리에게는 가능한 일입니다. 정말로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는 겸손을 생각하지 않고도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한 분에 대한 충성으로 가능합니다. 우리가 예수께 충성하고자 했을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겸손해집니다. 우리가 예수께 충성하고자 했을 때 자연스럽게 정직해집니다. 우리는 겸손과 정직을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오직 하나, 우리의 상관이신 예수에 대한 충성입니다. 그 충성만이 우리를 더욱 도덕적으로 만들어줍니다.


  그러나 이 충성은 쉽지 않습니다. 충성에는 언제나 댓가가 요구되고, 우리 자신의 희생이 요구됩니다. 바울이 5절에서 말합니다. "법대로 경기하지 않으면 승리를 얻지 못한다." 여기 나오는 승리하기 위해 지켜야 할, 하나님께서 정하신 공명정대한 법이란, 다름 아닌 '승리에는 그에 걸맞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법입니다. 마치 농부가 한 여름 뙤약볕 아래서 고생해야 잘 영근 낟알로 돌아오듯이, 고생없이는 승리도 없습니다. 


  오늘 만나는 모든 것 안에서 이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부처는 인생은 '고생'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이 고생으로부터 나 자신을 끊어버리자 했습니다. 기독교인도 동일하게 말합니다. 인생은 고생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고생을 더욱 붙들자 말해야 합니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말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승리 공식입니다. 이 연결만이 우리 안에 전우애의 전류가 흐르게 하고, 그 전류가 고생 뿐인 세상에서 빛을 밝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오늘의 견뎌야 할 고생을 함께 견디십시다. 나의 동료 여러분. 우리의 고생과 견딤이 십자가의 승리하신 한 분께 연결되어 있음에, 저는 이 시간 어떤 말로 우리의 대장께 감사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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