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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때 그 이끄는 자의 군병들이 그 예수를 본부로 넘겼고 그이에게 그 온 군대가 함께 모였다. 그리고 그들은 그이를 옷벗기고 붉은 겉옷을 그에게 두르게 했다, 그리고 가시들로부터 면류관을 짜서 그이의 머리 위에 얹었고 그이의 오른 편에 갈대 지팡이를, 그리고 그이 앞에서 무릎을 꿇고 그이를 조롱하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유대인들의 주권자시여"


  그리고 그이에게로 침뱉고 그 갈대 지팡이를 취해서 그이의 머리를 휘둘러 쳤다. 그리고 그이에게 조롱하고, 그 붉은 겉옷들을 벗겨 그이의 겉옷을 입혔다, 그리고 그이를 그 말뚝박힘(τὸ σταυρῶσαι) 속으로 이끌었다.


-심판받으시는 심판

  이번에 예수는 손을 씻은 필라토스의 군병들에게 넘겨졌습니다. 현시대를 심판하시는 분으로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심판하지 않고 오히려 그 현시대의 심판 아래로 넘겨지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심판 주의 심판받음'이 모순되는 것으로 보였던 요한복음의 두 구절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9: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요한복음 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즉 예수는 심판하러 왔으나 심판받으십니다. 그것도 어쩌다가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예수는 자신이 심판받는 심판 주라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계셨고, 능동적으로 그 수동적인 상태에 자신을 밀어넣고 있습니다. "넘겨주다"라는 표현은 그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조용한 판결
  그럼 심판받으신 예수는 아무런 심판도 하지 않는 것일까요? 심판하러 오신 그이가 심판하지 않으려 할 때, 이것은 오히려 직무유기 상황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심판은 조용하게 이뤄지고 있습니다. 얻어맞는 무고한 피해자의 내면에서부터 심판은 조용히 이뤄집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도 판결을 믿음과 결부시킵니다. 즉 믿음은 내면의 조용한 판결을 따라 실천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18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리고 그것을 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서도 소리없는 판결이 이뤄집니다. 빌라도의 불안은 바로 자기 내면에서부터 시작된 조용한 판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뒤에 확인할 두 혁명가들 중 한 사람도 사람들의 시끄러운 심판을 당하면서도 자신의 조용한 판결을 따랐습니다. 십자가의 자리는 예수께서 이스라엘로서 심판받는 자리이자, 그이의 조용한 판결이 이뤄지는 자리입니다. 이 십자가의 현장이 오늘날 우리에게 텍스트로 전달되었고, 이 텍스트를 읽는 우리에게 조용히 묻고 있습니다. '무엇이 옳으냐?' 그리고 우리는 예수가 옳다고 고백하면서도, 그이가 옳은 사람으로 남기 위해 지불한 댓가가 무척 크다는 사실에 그 뒤따르기를 주저합니다. 우리는 어쩌면 매주 빌라도처럼 손을 씻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댓가를 치루려고 하지 않을 때, 부당함을 감내하려고 하지 않을 때, 내가 말뚝에 매달리려고 하지 않을 때, 우리는 옳지 못하고 옳음 주위를 배회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 배회가 옳음의 걸음이라 착각하며 말입니다.

  "심판받는 심판 주"를 보고 있는 다른 사람들은 어떤 이해를 가지고 있었을까요? 넘겨지는 예수 때문에 유대지역에 주둔하던 온 로마 군대가 집결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내란방지법을 어긴 죄목으로 판결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판결에 '내용없는 판결'이란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러나 내용은 없지만 법은 예수에게 혁명가라는 이름표를 붙였습니다. 즉 예수는 로마를 폭력으로 전복시키려는 혁명가로서 로마 군대에 의해 취급되고 있는 것입니다.


  전장의 군인들이 포로를 능욕하듯, 로마 군인들은 예수를 조롱합니다. 그들이 이해하는 예수는 '로마를 힘으로 뒤집으려고 했으나 그 계획이 무참히 꺽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주권자"로 코스프레시킵니다. 만일 어떤 혁명가가 전쟁을 일으켜 그 쿠테타가 성공했다면, 그 전쟁을 이끈 혁명가는 왕이 됩니다. 불과 마카비 혁명 때 바로 그 일이 일어나 시리아를 몰아내고 하스모네안 왕조가 세워졌음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로마는 "심판받는 심판 주"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폭력을 써본 일이 없는 예수를 혁명가로 취급하면서도 뻔뻔할 뿐입니다. 

  예수는 주권자를 상징하는 홍포, 면류관, 지팡이를 착용합니다. 마태는 그들의 조롱이 오히려 진실에 가까웠다는 사실을 보여주려는 것 같습니다. 그들의 조롱 속에 진리가 들어있습니다. 예수는 주권자였습니다. 물론 사람들이 이해하던 주권자는 아니었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밖으로 나가던 이들이 퀴레네 사람을 발견했다, 시몬이란 이름의 사람이었다. 그들은 그에게 그이의 그 말뚝을 들어올릴 것을 부과했다. 그리고 그들은 "골고다"라 불리는 장소 속으로 갔는데, 그곳은 해골의 장소라 불린다, 그들은 그이에게 쓸개와 함께 섞인 포도주를 마시도록 주었다. 그리고 그이는 맛보시고 마시길 원치 않으셨다. 그런데 그들은 그이를 말뚝에 박고 제비를 던져 그이의 그 겉옷들을 몫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그들은 앉아서 그 자리에서 그이를 주의깊게 지켜 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그이의 머리 위에 그이의 탓(αιτια)을 기록한 것을 두었다.


  "이 사람은 예수 유대인들의 주권자이다."


-퀴레네의 시몬

  퀴레네 시몬에 대한 언급은 이 마태복음의 내용이 에클레시아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구레네 시몬"의 아들은 "루포"로 알려져 있는데, 이 루포는 로마서 마지막장의 교회 명단에 등장합니다.


로마서 16:13, 새번역

주님 안에서 택하심을 받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여 주십시오.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흔히 '억지로 해도 좋은거야'라고 말할 때 "구레네 시몬"이 많이 언급됩니다만, 당시 본문과 연결지을 수는 없습니다. 본문의 "밖으로 나가던 이들"은 로마 군병이었고 시몬은 식민지 백성이었습니다. 로마 군병이 부과하는 일을 고민해보거나 그만둘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성문 밖에서
  그림에서 제가 붉은색 원으로 표시한 곳이 골고다입니다. 골고다는 예루살렘 성벽 바깥 지역이었습니다. 그림에서 골고다를 두르고 있는 성벽은 "예루살렘의 세번째 벽(
The Third Wall of Jerusalem)"이라 부르는데, 요세푸스에 따르면[각주:1] 제 1차 유대전쟁 때(66–70 C.E.) 유대인들이 급하게 지은 것이라고 합니다. 즉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던 때는 그 이전이므로 저 세번째 성벽은 없었을 때입니다. 

히브리서 13:13,14, 개인번역

그러므로 예수도, 

그 씨알을 그 자신의 피를 통해 거룩케 하기 위하여, 그 성문 밖에서 고난당하셨다. 

그러니 이제 우리가 그를 향해 그 진영의 밖으로 가자, 그이의 비난을 가지고.

왜냐하면 우리가 여기 머문 도시를 갖지 않고, 오히려 도래할 도시를 곁에서 추구하기 때문이다.


  "골고다"는 도시 바깥이었고, 이 도시 바깥의 이미지는 그 도시에서 비난받으면서도 예수의 삶을 모방하려는 사람들, 특히 디아스포라 난민들에게 강하게 각인되었던 것 같습니다.

-시편 22편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이라 불리는 유월절 식사 자리에서, 하나님 통치의 새것으로 마시기 전까지는, 포도에서 나온 것을 마시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장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마가복음 14:25) 그이는 식초와 포도주를 섞은 음료를 거절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 형태의 말뚝에 박히셨습니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 보여주듯, 이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장면은 클라이막스이고 자세히 묘사해야 할 것 같은데, 마태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저 한 줄 "그들은 그이를 말뚝에 박고" 뿐입니다. 장면은 오히려 예수의 옷을 갖고자 제비 뽑는 군병들에게로 넘어갑니다.

  네 개의 복음서 전부가 이 옷을 갖기 위해 제비 뽑는 장면을 말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7:35, 마가복음 15:24, 누가복음 23:34, 요한복음 19:24)[각주:2] 사형당하는 포로의 옷을 갖기 위해 제비 뽑은 것이 무슨 대단한 사건인가 싶지만, 이 장면은 시편 22편과 연결됩니다.


시편 22:18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

  시편 22편은 메시아의 십자가 사건을 이해하는 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시편 22편과 더불어 메시아의 십자가 사건을 이해해야 합니다. 슬라보예 지젝은 십자가 사건을 하나님의 자기 부정으로 이해하는데, 이는 시편 22편을 경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기는 오해입니다. 그 첫 구절과 마지막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시편 22:1, 개역개정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

시편 22:30,31, 새번역

내 자손이 주님을 섬기고 후세의 자손도 주님이 누구신지 들어 알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도 주님께서 하실 일을 말하면서
'주님께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셨다' 하고 선포할 것이다.

-이 사람은 유대인들의 주권자이다

  옷을 나누어 가진 이들이 벌거벗은 예수를 주의깊게 바라보며, 그 십자 말뚝 위에 "그이의 탓(αιτια)"이 기록한 것을 부착했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 유대인들의 주권자이다" 제가 "탓"이라고 번역한 희랍어는 아이티아라고 읽는데, 희랍 철학에서 자주 등장하는 단어이고, 이때는 "원인"으로 번역됩니다. 즉 '이 사람이 이렇게 십자가에 매달린 원인'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원인은 '이 예수라는 사람이 유대인들의 주권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문구를 싫어했습니다. 싫어한다는 것은, 저 아티아가 사실처럼 명시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로마(빌라도가 작성했습니다)는 '이 실패한 혁명가가 유대인의 왕이다'라는 의미로 유대인을 비꼬고 싶었고, 유대인들은 '이 실패한 혁명가'가 자신들의 왕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때 로마와 유대가 공유하고 있는 것은 '왕은 혁명가'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사사기를 떠올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들어선 이스라엘에게 사사, 즉 판단하는 사람을 보내주셨습니다. 사사는 다른 사람들의 노동력을 착취할 권한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사사가 아닌 주권자(왕)를 요구했습니다. 중앙집권체제를 가지고 다른 민족을 정복하는 이방 민족이 부러웠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여전히 왕을 요구했습니다. 그 왕에 메시아이고, 그 메시아는 혁명가이며, 그 혁명가가 박살내려고 하면서도 되려는 형상이 바로 로마 황제입니다. 즉 로마와 유대가 공통적으로 바라던 왕의 형상은 '이웃을 심판하는 자'입니다. 혁명가입니다.

  그리고 복음서의 독자는 자연스럽게 저 "유대인들의 왕"이라는 글귀를 한 번 더 비틀게 됩니다. 예수는 정말 왕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혁명가는 아니므로, 혁명가가 아닌 왕, 즉 이웃의 노동력을 착취하더나 심판하지 않으면서도 이웃을 다스리는 신개념의 왕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때 그이와 함께 두 혁명가들이 말뚝에 박혔는데, 오른쪽들로부터 하나, 그리고 왼쪽들로부터 하나가. 그런데 곁을 지나는 이들은 그이를 모욕하며, 그들의 그 머리들을 움직이며(κινέω) 말하길, 


"그 성전을 무너뜨리고 삼 일에 건설하는 이여, 

너 자신을 구원하라, 만일 네가 그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리고 그 말뚝으로부터 걸어 내려오라."


  이와같이 대제사장들이 그 문법학자들과 장로들과 함께 조롱하며 말했다.


"그이가 다른 이들은 구했다, 

스스로를 그이가 구원할 수는 없다.

그가 이스라엘의 주권자이다,

그이가 지금 그 말뚝으로부터 걸어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그이에게 신실하겠다.

그가 그 하나님께 설득되었다니, 

지금 그가 풀려나리라, 만일 하나님께서 그를 원한다면.

왜냐하면 그가 말하길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이 사실에 대해서 그이와 함께 말뚝에 박힌 혁명가들도 그이를 욕했다.


-혁명가들과 非혁명가

  혁명가 아닌 예수 옆에는 두 명의 혁명가들이 매달려 있습니다. 예수와 함께 잔을 마시며 하나님 나라 도래를 가져온 사람들입니다. 이 두 사람은 혁명가의 방식이 잘못되었음을 주권자 옆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혁명가의 방식은 심판입니다. 그들은 심판하고자 했기 때문에 골고다로 왔습니다. 그러나 주권자 예수는 심판을 철회하고 심판받으려 했기 때문에 골고다로 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사람들의 발언들을 통해서, 마태는 예수가 혁명가와 어찌 다른지를 보여주고자 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무너뜨리고 건설하겠다는 이야기는 '성전 정화'로 들렸을 것입니다. 성전 정화와 악을 섬멸하는 전투는 메시아의 중대한 과업입니다. 따라서 "그 성전을 무너뜨리고 삼 일만에 건설하는 이"는 곧 메시아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이때 유대인들이 "성전"을 자신들의 특정 지역과 건물을 말하고 있음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전'은 신약성경에서 '예수의 몸/창조세계 전체'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성전은 '전체'입니다. '원수 사랑'은 전체를 염두하기 때문에 나오는 생각입니다. 

  예수는 자신이 파괴당할 것이고, 그 파괴당한 자신이 살아날 것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온 우주도 결국 사라질 것이지만, 새로운 우주가 등장한다는 것이 신약성경의 비전입니다.


  즉 예수께서 자신을 파괴하려는 이들에게 넘겨지셨던 것은, 그렇게 멸망당한 당신으로부터 멸망을 극복하는 새로운 운동을 시작하기 위해서이고, 그이의 제자들은 그이의 운동이 전체에 이를 것을 확신했기 때문에 파괴당하는 쪽으로 넘겨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메시아는 전체와 무관합니다. 오히려 전체를 분할하고 한 쪽을 파괴합니다. 이때 자신은 파괴와 멸망의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스스로 구원하라"라는 그들의 외침을 따라, 만일 예수께서 정말 십자가에서 걸어 내려왔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적어도 유대인들의 생각은 이러했을 것입니다. 예수가 자신을 못박았던 로마 군병들부터 쓸어버리고, 로마에 의해 더럽혀진 성전을 재건한 뒤, 유대인들 중심으로 세계를 재편을 해야 한다 말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아들"은 이러한 일을 해야 하는 존재였습니다. 신천지도 이와 비슷하지 않습니까? 자신들 중심의 세계 재편, 그 일을 이룬다는 보혜사.

-당신이 당신의 통치 안으로 들어가실 때

  혁명가들은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예수를 욕했습니다. 메시아라고 주장했으면서 왜 십자가에 매달려 있냐고. 어서 "성경대로" 유대인들의 갈망을 이뤄달라고. 그래서 나도 좀 살려 달라고. 마태는 말하고 있지 않지만, 우리는 두 혁명가 중 하나가 마음을 바꿨다는 것을 누가를 통해 알고 있습니다. 그 마음 바꿈은 자신이 바라던 혁명이 결국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는 체념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는 정말 아무 잘못도 없다는 사실에 대한 인정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조용한 판결에 따라 예수를 옳은 사람으로 인정했습니다.

누가복음 23:42, 개인번역

"예수여, 당신이 당신의 통치 안으로 들어가실 때 반드시 나를 기억하십시오!"

  이 구절을 잘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혁명가는 지금 죽어서 좋은 곳에 가고 싶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이 당신의 통치 안으로 들어가실 때"가 바로 우리가 마태복음 24:3에서 확인했던 "주의 임하심"입니다. 이 표현은 예언서들의 주제인 '하나님의 시온으로의 귀환', 즉 인자가 하나님으로서 드러나는 것을 가리킵니다. 즉 혁명가는 예수를 인자로, 하나님의 아들로 보고 있습니다. 즉 "당신의 통치"는 곧 "하나님의 통치", "천국"을 의미합니다. 이 혁명가는 조용히 판결하기를, 잘못이 없는, 십자가형이 부당하기 이를 때 없는, 이 올바른 사람 예수의 통치가 이 땅에 이뤄질 것을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혁명가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었습니다. 이때 '낙원'은 현실과 무관한 사후세계를 가리키는 표현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낙원은 최종적인 종착지가 아니라, 부활 때까지의 대기를 의미합니다. 즉 예수는 강도의 부활을 말씀하셨습니다. 즉 예수의 말씀은 '네가 오늘은 낙원에 있을테지만, 너는 다시 일어나서 나의 통치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인 것입니다. 혁명가는 자신이 살아보지 못한 삶을 살게 될 것을 기대하며 잠들었을 것입니다. 스데반처럼 말입니다.


  물론 이 내용을 마태는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마태는 더 급박하게 시편 22편의 실현되었음을 다시 보여줍니다.


그런데 여섯번째 시간으로부터 어둠이 모든 땅에 있었다, 아홉번째 시간까지. 그런데 그 아홉번째 시간 즈음 예수께서 큰 소리로 울부 짖으시며(ἀναβοάω) 말씀하셨다.

  "헬레이 헬레이 레마 사박따네이?"

이것은 다음과 같다.

  "나의 님이여, 나의 님이여, 어찌 나를 버려두셨습니까?"


  1. (The Jewish War, V.148–155) [본문으로]
  2. 마태복음 27:35 저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마가복음 15:24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나눌새 누가 어느 것을 얻을까 하여 제비를 뽑더라 누가복음 23: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요한복음 19:24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병들은 이런 일을 하고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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