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피아노>

  이 블로그를 2013년부터 운영해온 이후 연극 리뷰는 처음인 것 같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고, 오늘 머리 감다가 이런 저런 생각이 나기에, 잊기 전에 몇 자 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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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장 인물은 이러하다.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윤슬이라는 아이와 그 아이를 동경하는 두 명의 학생. 그리고 윤슬이 외에는 쓰레기 취급하는 레슨 선생, 윤슬이 뱃속에 자라는 아이의 아빠되는 배관공. 이 등장 인물들의 삶은 윤슬이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레슨 선생은 자신의 젊은 날을 윤슬이가 재연해주길 바라고, 배관공은 윤슬이와 결혼하길 바라며, 두 학생은 윤슬이가 레슨실에 남기를 바란다. 윤슬이는 주인기표의 자리, 곧 남근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윤슬이가 남근 기표라는 사실이 배관공의 대사를 통해 노골적으로 표현된다. "너희들도 조금 있으면 피아노 건반이 아니라 남자의 거기를 붙잡고 싶어 할..." 이런 대사였는데, 배관공은 이미 학생들이 남근을 단단히 붙들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듯 하다. 학생들은 연극 처음부터 끝까지 남근을 놓쳐본 적이 없다.

  주인 기표를 중심으로 상징계가 구성되고, 상징계는 곧 모든 것이 이해되어야만 하는 세계이다. 그리고 이 상징계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다름 아닌 실재, 상징계의 담론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무엇,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그저 '없음'이라고 기각할 수 밖에 없는 그것. 이름 모를 두 학생은 윤슬이를 이해하지 못할까봐 두려워하기까지 하는데, 이 두려움은 상징계 안에서 실재를 대면했을 때의 두려움, 불가해함에서 발생하는 두려움이다.

  이 두려움이 상징계의 닫힌 세계(레슨실로 표현되는)를 극복하는 분수령이었을테지만, 두 학생은 실재를 다시 상징계의 이면으로 덮는 쪽으로, 그래서 다시 윤슬이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로 남고자 한다. "윤슬아, 우린 너를 이해해!" 저 이해한다는 말은 실재를 기표들 속에 파묻는 이들의 허울 좋은 변명 아닌가? 저 '이해' 때문에 두 학생은 자신들이 동경하는 타자에 대해서 모르는 것 없는 사람으로 남게 되고, 윤슬이는 저들을 위해 자신의 실재를 포기해야하는 노예로 전락한다. 즉 저 '이해'는 지배자의 자기 변명이다.

  그런데 정작 윤슬이는? 윤슬이는 '거리'를 말한다. 피아노와 자신 사이의 거리. 즉 실재의 나와 다른 사람들에 의해 이해되고, 평가받는 나 사이의 거리 말이다. 그리고 윤슬이는 실재로서 타인에게 받아들여지길 원한다. 실재는 기표(피아노)가 없어도 실재다. '피아노'라는 기표는 윤슬이가 붙잡았을 때는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이지만, 윤슬이 외에 다른 사람들은 같은 기표를 윤슬이의 실재를 은폐하기 위한 수단이다. 윤슬이는 '나'와 '피아노' 사이의 거리를 말하고, 타인들은 윤슬이가 말하는 '나(윤슬이)'는 곧 '피아노'라 말한다. '피아노가 없는 자신을 받아들여 주겠느냐'는 윤슬이의 말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윤슬이의 실재를 수용하기 위해, 무대를 차지하고 있는 피아노는 적극적으로 폐기되어야 했다. 피아노가 사라진 피아노의 자리에서만이, 윤슬이가 누구인지에 대해 또다른 기표들을 찾아나설 수 있을테니 말이다. 레슨실이라는 닫힌 사회를 깨뜨리기 위해서라도 그 산고의 고통은 꼭 필요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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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이 이야기는 메시아 담론과 흡사하지 않은가? 2000년 전 메시아를 바라던 다양한 분파들이 있었다. 그런데 각기 다른 분파들이 메시아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보이든지간에, 그들은 메시아라는 주인 기표를 통해 자신들의 정의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그들이 마주한 메시아의 실재는, 그들이 기표들을 모아 구성한 메시아와 달랐고, 그 실재와 상징사이의 거리를 일축하기로한 전 민족적 움직임은 메시아의 실재를 산채로 십자가에 매다는 일이었다.

  결론은 이러하다. 마치 2000년 전 유대인들처럼, 극 중에서도 학생들은 끝내 '피아노 없는 윤슬이'를 거절했고, 윤슬이는 그들 곁을 사력을 다해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상징계는 비로소 실재를 마주했으나, 그 실재를 은폐하고자 했고(선생과 두 학생은 윤슬이의 낙태를 종용한다), 레슨실은 생명 없는 공간, 아감벤이 생명정치라고 말하는 이데올로기적 공간으로 다시 남게 되었다. 

  각 인물간의 개연성의 측면에서 왜 그랬나 싶은 장면들이 더러 있다. 예컨데, 윤슬이는 아이를 창조하고 싶어서 그저 배관공의 정자만을 필요로 했던 것처럼 느껴졌고, 또 자기를 끔찍하게 아껴주는 레슨 선생에 대한 윤슬이의 태도는 너무 급박해 보였다. 각 개인의 감정에 몰입할 수 없을 때 보이는 것은 전체다. 감흥 없이 차가운 시선으로 전체를 조망하게 된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피아노라는 거대한 기표와 그 기표를 중심으로 얽매여 있는 사람들, 그리고 출구인듯 하나 다시 돌아올 수 밖에 없는 닫힌 세계. 그 상징계를 비로소 깨뜨릴 수 있던 것은, 콩쿨에서 상을 받는 윤슬이가 아니라, 임신한 윤슬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시기를 놓쳐버렸고, 메시아는 떠나버렸다. 마지막 장면에서 두 학생의 눈물은, 메시아를 기다렸으나, 정작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고, 메시아를 죽이려 했던 이들의 눈물, 실재를 은폐하려는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면서도, 그 잘못이 만든 결과에 대해서 온 몸으로 느끼고 있기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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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에게도 임신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피아노를 기대하겠지만, 나와 피아노 사이의 거리를 드러낼 수 있는 그 길이 바로 임신이다. 그 임신의 충격만이 비로소 나의 실재에 관하여 타인이 고민하게 만드는 길일지도 모른다. 설령 그들이 나를 이해하고 싶어하지 않을지라도. 그 과정을 겪지 않으면, 우리는 결국 피아노라는 매개 없이는 결코 만날 수 없을테니 말이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든다. 그 자리에서 배우와 관객으로 만난 사람들이야 말로 서로 실재를 감추고 있지 않은가? 배우는 자신이기 이전에 자신이 내세우는 배역으로 비춰지길 원하고, 관객은 침묵하며 자신이 누구인지를 다수성 뒤에 감추고 있지 않았나? 마지막 장면에서 눈물 흘리고 있는 두 학생은, 사실 기표없이는 관계할 수 없음을 깨달은, 우리 자신의 비참함이 아닐까? 배우과 관객은 우리 소통의 비극적 결말을 보고서 함께 눈물 흘려야 하지 않았을까? 마치 피아노 없이는 등장인물들의 관계를 상상할 수 없었던 것처럼, 그 연극이 아니었다면 배우와 관객이 만날 이유가 없었던 것처럼, 우리가 가진 괴물같은 실재성이 감춰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소통할 수 없다는 사실에 흐느끼며. 그러나 그 실재가 감춰지기만 한다면 우리는 서로를 떠나고만 싶을 것이다. 우리는 기표를 통해서만 소통해왔는데, 정작 그 기표는 너와 나 사이를 가로 막고 있지 않은가?


  이로써 나는 인간은 기표를 통해 소통하지만, 결국 바로 그 소통을 위해서 기표를 버리는 데 이르러야 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다. 마치 신과 인간의 관계가 법조문으로 시작했으나, 그 법조문 없는 관계, 곧 숨결로 마주하는 관계에 이르러야 한다고 그 옛날 책이 일러주듯이, 우리는 함께 갖고 함께 버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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