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이름이 '면류관'인 사람

  오늘 우리는 사도행전 7장의 스데반이란 사람의 최후 변론을 들어보겠습니다.

 

  그 전에 이 사람을 아시나요? 이 사람은 스테판 커리라는 NBA에서 활약하는 농구 선수인데요. 이름 "스테판"입니다. 성경에는 '스데반'이란 사람이 있는데, 발음만 다를 뿐 같은 이름입니다. 희랍어로는 스테파노스라고 읽어요. 이 이름의 뜻은 승리한 사람 머리에 씌워주는 관 "면류관, 월계관"입니다.


  일단 우리가 살펴보려는 사람은 농구 선수가 아니라 2000년 전 살았던 유대인이니까요. 머리에 뭘 씌워줍시다. 


(전환)
  이스라엘에는 "투석형"이라는 처형방식이 있었어요. 사람을 땅에 반쯤 파묻고 도망치지 못하게 한 다음, 마을 남자들이 나와 돌을 던져서 죽이는 끔찍한 사형제도였습니다. 


(두 증인)

  그런데 그런 처형에도 규칙은 있었습니다. 두 명 이상의 증인이 필요했어요. 그럼 스테파노스, 스데반, 그가 이 지경이 되도록 고발당한 내용은 무엇이었을까요? 네 가지 죄목이 있었습니다. 먼저는 하나님과 모세를 비난했다는 혐의 그리고 성전과 토라를 비난했다는 혐의. 이 네 가지는 유대인들이 정말정말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인데, 


(빨간색)

이 네 가지를 스데반이 모독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데반이 투석형에 처하는 이유에요.


(위로)

  그럼 이제 스데반이 죽기 직전 최후의 변론을 시작합니다. 그 말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남자 형제들이여, 그리고 아버지 들이여, 들으시오!" 그리고 곧 죽을지도 모르는 사람이 꺼낸 이야기는 뜻밖에도 옛날 이야기였습니다.


1. 아브라함 이야기를 : 떠돌이/나그네의 씨

(지도)

  이 지역은 메소포타미아라는 지역입니다. 피아노 배울 때 메조포르테, 메조피아노, 이런 용어들이 있잖아요? 이때 이태리 말로 메조가 여기 메소랑 같은 거에요. 중간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포타미아는 강이란 뜻이에요. 그래서 메소포타미아는 강 중간이란 뜻입니다. 그 말 그대로 저 위로는 티그리스강, 그 아래로는 유프라테스강이 있는데 그 강 사이를 의미합니다. 오늘날의 이라크 지역이에요.


(화면 기울임)

  그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살던 아브라함이란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너의 그 땅으로부터, 너의 그 가족들로부터 떠나라! 지금 내가 너에게 보여줄 그 땅으로!"


  그 말을 듣고 아브라함은 용기있게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래서 당도한 지역은 하란이란 곳인데요. 하란에서의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주시려는 땅도 아니었고, 아버지와도 헤어지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아버지 데라가 죽지요. 그리고 마침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당도합니다. 오늘날의 이스라엘 지역이에요.


  이 사람이 아브라함입니다. 그럼 이제 아브라함에게 땅을 주실만도 하잖아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약속에 땅에 도착했지만, 정작 그 땅을 상속받진 못합니다. 줄곧 그 땅의 이방인으로, 떠돌이로, 나그네로 살게 됩니다. 게다가 하나님은 땅도 받지 못한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달달말숨'의 <토 스페르마>편(링크)을 들으셨던 분은 아실거에요. 제가 "씨"라고 번역한 이 말은 자손, 후손으로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400년동안 다른 민족의 노예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400년 이후 그 노예 삼았던 민족이 심판받고, 아브라함의 자손은 그 땅에서 나와서 하나님을 예배하게 될 것이라고 미리 말씀해주셨어요.


(화면 전환)

  그럼 이번에는 아브라함의 씨를 살펴봅시다. 아브라함의 자손은 이삭이에요. 이삭의 자손은 야곱입니다. 그리고 야곱의 자손은 그의 열 두 아들들이지요. 이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버지들", "조상들"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저 야곱의 열 두 아들들 중에는 형들에게 이집트로 팔려간 동생 요셉도 있었지요. 어찌되었든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는 이 모든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그 공통점 때문에 스데반은 이 사람들 이야기를 한 것이었어요.


  이 사람들, 즉 이스라엘은 모두 나그네/떠돌이였습니다. 즉 땅을 약속받았지만 땅을 소유하지는 못했던 사람들이었어요.


  그리고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노예가 되었습니다. 요셉이 이집트의 총리였고, 또 그 총리의 가족들이 손님으로 이집트에 들어온 것이었는데, 시간이 한참 지나고,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이집트의 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새로이 등극한 파라오는 자기 땅에 사는 이 낯선 사람들이 손님이 아니라, 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항하지 못하도록 자기 발 아래 꿇려놓을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 자손의 극심한 고생이 시작됩니다.


2. 모세의 이야기를 : 이스라엘은 모세를 줄곧 거절했다

(전환)

  그리고 스데반의 이야기는 모세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이집트의 왕자였던 모세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구해주고 싶었어요. (전환)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을 구해주고자 이집트 사람에게 폭력을 휘둘렀던 모세를 보고, 우리에게도 폭력을 휘두를 것이냐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 말에 모세는 곧장 달아나 자신의 조상들처럼 40년간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떨기나무에서 불붙었지만 불타지 않는 떨기 나무 앞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어요. "내가 너를 이집트로 보낸다"


  그리고 모세가 돌아왔습니다. 이스라엘을 정말 구하기 위해서요. 그럼 이스라엘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누가 널 우리의 지도자로 뽑았단 말이냐?" 하나님이 뽑았잖아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모세를 거절하고, 이건 하나님도 거절한 것이나 마찬가지이죠. 

  게다가 모세가 "니 같은 지도자가 나타날 거야"라고 말헀는데도, 이스라엘이 만든건 모세같은 지도자가 아니라 모세와 전혀 상관없는 지도자였습니다. 


  바로 금송아지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금송아지를 앞세워 이집트로 돌아갈 생각이었어요. 그러면서 바로 이 금송아지가 우리를 출애굽시킨 하나님이라고 소리쳤습니다. 이런 말도 안되는 우상숭배가 금송아지 한 번 뿐이었던 것도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몰록이란 우상을 섬기기도 했는데, 이 우상은 어린 아기를 산채로 불속에 던지는 끔찍한 우상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토성을 레판이라 부르며 신으로 섬기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극심한 우상숭배에 빠지자, 그들이 살고 있던 땅을 빼앗아 이방 제국들의 포로가 되게 하셨습니다.


3. 포로기와 성전을 : 성전은 전쟁이 아닌 증거를 위해

(전환)

  포로기 이야기가 나오자 이제 스데반은 성전 이야기를 이어가려고 합니다.


  광야에서 모세가 하나님이 보여주신대로 만든 것이 성막입니다. 스데반은 "증거장막"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모세의 바통을 이은 여호수아라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은 히브리어로 하면 여호수아고, 희랍어로 하면 예수에요. 그러니까 여호수아와 예수는 같은 이름입니다. 우리가 아는 예수님도 히브리식으로는 여호수아에요. 어찌되었든 그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이끌고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성막 때문에 이겼다고 말하지 않았어요. 하나님이 먼저 이방인들을 내보내주셨기 때문에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성전 이야기는 다윗으로 넘어갑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토록 존경하던 다윗은 하나님의 증거장막을 보면서 안타까웠습니다. 자신이 사는 집에 비하면 성막은 초라해보일 뿐이었으니까요. 그런데 그 다윗 마저도 성전을 지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의 아들인 솔로몬이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성전은 증거장막입니다. 증거장막은 이방민족을 쳐부수기 위한 무기가 아닙니다. 여호수아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앗시리아, 바벨론,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시리아, 로마의 지배를 받으면서 성전을 오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성전에만 하나님이 사신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내세워서 사람들을 전쟁으로 모으고, 로마로부터 땅을 되찾아오려는 떠돌이/나그네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폭력행위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미 옛날 이사야라는 예언자는 사람이 만든 건물 따위는 결코 하나님의 집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예언했습니다. 하나님의 집은 하늘과 땅, 이 창조세계 전체입니다. 그리고 건물 성전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언하기 위한 것이지, 전쟁과 특정 민족의 승리를 위한 것일 수 없습니다.


(전환)


4. (예수를 죽인) 당신들의 완고함을


  그리고 이제 스데반은 자신의 최후 변론의 결론을 제시합니다. 


"목구멍이 마르고 가온과 귀에 할례받지 않은 바로 당신들이, 거룩한 숨님을 늘 거역하고 있습니다!"


  옛날 이스라엘의 아버지들의 경우를 먼저 보여줍니다. 이 사람들은 십계명을 비롯한 토라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에게 예언자가 나타나서 외칩니다. "의인이 올 것이다" 그런데 의인이 온다는 예언자의 말을 그들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이 싫어하는 말을 하는 예언자와 그의 말을 함께 지워버립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진 토라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럼 이번에는 그들의 후손인 스데반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도 하나님의 토라를 열심히 연구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이번에는 의인이 올 것이라는 예언자가 아니라 의인 자신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반응은 그들의 아버지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잘못됨을 폭로하는 의인을 살해하는 일입니다. 


(회전)


  그런데 그들이 밤낮으로 연구하는 율법에는 그렇게 해선 안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회전)


  그럼 옛날 이스라엘의 아버지들이나, 스데반 시대의 이스라엘이나 별반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전환)

  

  그들은 나그네이면서도 땅을 되찾는 일에 눈이 돌아가서, 모세의 율법을 왜곡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창조세계 전체인데, 자신들의 건물에만 집착했고요. 그 결과는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5. 스데반의 '잠듬' 

  그럼 이번에는 어떨까요?


(이빨 사람)


  "그런데 지금 우리의 내용을 들은 사람들은 마음이 찔렸고, 그 찔림은 자기 반성으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를 부득부득 갈며 여전히 그 마음은 완고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전환)


그때! 

스데반이 말했습니다.


"내가 목격하고 있다"

"틈이 벌어진 하늘과

하나님의 오른편들로부터 서 있는 인자를!"


  이 말을 듣자 이스라엘 사람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가지고 있던 돌을 스데반에게 던졌습니다. 


  그리고 이때 스데반을 고발했던 증인들은 자신의 겉옷을 어떤 남자의 발 앞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에게 '겉옷'은 중요한 재산이었거든요. 아마도 저 옷을 받은 남자는 스데반의 죽음을 뒤에서 움직이고 있던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사람의 이름은 히브리식으로는 '사울', 로마 식으로는 '바울'이라 부릅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 예수여, 나의 이 숨결을 받아주세요."

"주 예수여, 저 사람들에게 (나를 살해하는) 이 죄를 돌리지 말아주세요.(나는 괜찮아요)"


  스데반의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과 아주 많이 닮아있습니다. 스데반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그 죽기 직전의 말을 통해 드러납니다.


  그리고 스데반 이야기는 이렇게 마무리 됩니다.


  "그리고 이것을 말하고 그는 잠들었다."


  사도행전을 쓴 누가가 스데반을 "잠들었다"고 기록한 것은, 스데반이 이러한 비참한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스데반이 영광의 부활로 다시 살아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스데반이 다시 일어날 때, 우리도 함께 영광의 부활로 일어날 것입니다. 스데반과 우리는 모두 에클레시아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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