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

1.

마태복음 26:3~35, 개인번역


  그때 대제사장들과 그 씨알의 장로들이 "가야바"라 이야기되는
그 대제사장의 마당(αυλη) 속으로 함께 모였다, 
그리고 함께 논의했다,
이는 그들이 그 예수를 계책으로(
δόλῳ) 붙잡고 죽이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말했다.


  "명절 때는 그러지 맙시다, 

  이는 그 씨알 안에서 폭동이 없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유대 지도자들의 우상숭배적 모의

  대제사장들과 이스라엘의 어른들이 가야바의 집에 모였습니다. 가야바 개인의 집 마당에 유력 정치인들이 모였다는 사실은, 이 모임이 정당한 결정을 내리기 위한 공식적인 자리가 아닌, 음모를 꾸미기 위한 비공식적 모임임을 보여줍니다. 그들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예수를 붙잡아 죽이는 것입니다. 목적은 결정되었으니 이제 '방법(δόλῳ)'만이 남았습니다. 가야바 일당이 어떤 안건들을 내놓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가야바 일당이 피하고자 하는 방법 한 가지는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명절 기간에 죽일 생각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대제사장 선출도 자유롭지 않았습니다. 로마의 총독에게 대제사장을 임명할 권한이 있는데, 가야바라는 인물은 빌라도 이전 총독이었던 발레리우스 그라투스가 임명한(A.D.18) 사람입니다. 즉 가야바는 대제사장이면서도 로마와 커넥션이 있던 인물입니다. 그리고 로마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이 바로 "폭동"입니다. 로마가 광장에 많은 사람들이 운집할 수 없도록 분수를 만들었던 것도, 콜로세움을 만들어 사람들을 잔인한 광경에 중독되도록 했던 것도 모두 이 인민들의 폭동을 피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로마가 임명한 대제사장 가야바도 마찬가지의 우려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의 환호를 그들도 보았기 때문입니다. 자칫하다간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적으로 돌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 모종의 "계책"이 필요한 것이지요.

  마치 금송아지를 제작하고서 이 금송아지가 "출애굽의 하나님"이라고 주장했던 자신들의 조상들처럼 말입니다. 자신들의 의도는 은폐하면서도, 전체의 방향을 움직이기 위한 계책이며, 이것은 곧 신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선동하려는 우상숭배였습니다. 지금 가야바 일당들이 세우는 계획처럼 말입니다. 무고한 이웃을 어떠한 정당성의 이름으로 살해하려고 할 때, 그 이름은 신성모독적 이름이며 곧 우상숭배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베다니 안에 있는 한센병자 시몬의 집 안에 계셨을 때, 

많은 가치의 향유의 설화석고 그릇을 가진 여자가 그이 앞으로 왔고

기대어 있는 그이의 머리 위로 부었다. 


  마태는 가야바네 마당에서 베다니로 카메라를 옮깁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동네이며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가 살고 있는 동네입니다. 그리고 그들 뿐 아니라 "한센병자 시몬"도 살고 있었습니다. 마태는 바로 그 집에서 일어난 사건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같은 사건을 마가는 마가복음 14장에, 요한은 요한복음 12장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개역성경이 "옥합"이라고 번역한 '알라바스트론(
ἀλάβαστρον)'은 본래 이집트의 도시 이름입니다. 이 도시에서 만든 그릇을 가리켜 알라바스트론이라 부르는데, '옥합'이라는 번역처럼 옥(玉)은 아니고, 설화석고(alabaster)입니다. 

  
요한에 의해 마리아로 알려진 한 여인(요한복음 12:3)이 이 그릇 안에 향기나는 기름을 담아 한센병자 시몬의 집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요한은 가격을 "300 데나리온(요한복음 12:5)"이라 말합니다. 1 데나리온이 노동자 하루 품삯이었으니, 300데나리온은 노동자가 1년을 꼬박 일해야 벌 수 있는 금액입니다. 향유는 여러 용도로 사용되었으나, 이 300 데나리온이나 하는 비싼 향유는 '제의용'으로 거룩한 의식에 사용되는 특상품이었을 것입니다. 그걸 여인은 예수의 머리 위에 통째로 부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향유가 흐르는 발을 닦았습니다. 방 전체는 향유의 향기로 진동했습니다(요한복음 12:3).


그런데 (이를) 본 제자들이 분개하며 말했다.


  "대체 무엇을 위해(εις) 이런 멸망(ἀπώλεια)이?

  왜냐하면 이것이 많은 가격에 팔 수 있고 

  거지로 전락한 이들에게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을 위한 멸망인가?
  제자들의 반응은 '분개'였습니다. 요한은 저 구절이 가룟 유다의 말이었다고 증언합니다(요한복음 12:4). 가룟 유다는 제자들 중 회계 업무를 담당했던 사람이었고, 여러 차례 제자들의 돈궤에서 돈을 훔쳤습니다. 그랬던 그가 돈을 아껴쓰지 못한다고 훈계하는 모습이란, 참으로 모순입니다. 마치 권력에 대해 비판하는 연극을 올리는 연출자가, 뒤에서는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성폭력을 일삼는 격입니다. 그리고 아직까지는 가룟 유다를 자신들의 동료라 생각하고 있는 다른 제자들도 여인의 행동에 대해서 분개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제자들의 대사, "대체 무엇을 위해 이런 멸망이?" 는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상황에 부합하는 의미 전달을 위해서 "낭비"로 의역할 수도 있겠지만, "아폴레이아(ἀπώλεια)"라는 단어는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내용의 핵심단어였으므로(특히 동사 형태로, απολλυμι), 이 문맥에서 어색해보이지만 그래도 "멸망"이라고 번역해 두었습니다. 아폴레이아는 그릇에 대해서는 "깨짐", 돈에 대해서는 "낭비", 민족에 대해서는 "멸망"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7:13,14, 개인번역

너희들은 좁은 문을 통하여 안으로 들어가라.

멸망(ἀπώλεια) 속으로 이끄는 그 길은 넓고 넉넉하다,

그리고 그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는 이들이 많다.

즉 그 삶 속으로 이끄는 그 길은 좁고 눌림이 있다,

그리고 그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는 이들이 적다.

  예루살렘 멸망이 임박한 이 시점에서, '대체 무엇을 위해 예루살렘이 멸망하는가?'의 물음이 복음서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복합적이겠지만, 마태는 이스라엘의 타락과 그 타락 속에서도 새로운 사람들을 탄생시키기 위한 "산고의 고통"을 반드시 언급할 것입니다. 이유가 없어보이는 그릇의 파멸로부터 방 안을 가득 채우는 향기가 넘쳐났듯이, 이유가 없어보이는 예수의 파멸로부터 코스모스를 뒤덮는 신의 "거저"가 넘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 제자들의 시각에서는 그 "멸망"이 당장은 무의미해 보입니다. 당장 (무의미한) 멸망을 피해서 그들 곁에 있는 가난한 자들을 위해 나눠주는 편이 좋은 선택으로 보입니다. 이 멸망을 자처하는 것은 분개할만큼 어리석은 일로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게 된 것은, 가난한 자들에게 돈을 나눠주는 것으로는, 이 멸망하는 도시 안에서 새로운 사람들이 탄생할 수 없었다는 사실과, 
예수의 자기 파멸의 길만이 구원을 이룰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오직 법에 충실한 자의 부당한 죽음을 통해서만이 그 법 해석자들의 자가당착적 허위가 폭로되고, 그 부당한 죽음만이 법의 목적을 완성시킬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말하셨다.


  "왜 너희들은 그 여자에게 괴로움들을 내놓느냐?

  왜냐하면 그녀는 온전한 노동을 나를 위해 일했기 때문이다.

  즉 너희들은 모든 때에 그 거지로 전락한 이들을 너희 자신들과 함께 갖고 있다, 

  그런데 너희들은 모든 때에 나를 (너희 자신들과 함께 갖지) 못한다.

  즉 바로 이 향유를 나의 이 몸에 던진 그녀는 나를 장례치르기 위해(προς) 행한 것이다.

  아멘 내가 너희들에게 말한다, 바로 이 좋은 소식이 온 코스모스 안에서 선언된다면 반드시, 

  그녀가 했던 것도 그녀를 기억하기 위해 (사람들에 의해) 말 될 것이다."


-나를 내어놓는 온전한 노동
  제자들은 "낭비"로 보았던 행위를 예수는 "온전한 노동"으로 보십니다. 아무런 결과도 내놓지 못할 것이라고 분개했던 그 행위가 실은 온전한 결과를 내놓는 온전한 노동이었다고 말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예수 자신이 내리시는 평가가 아닙니까? 제자들은 예수의 죽음을 "낭비, 멸망"으로 보았기 때문에, 예수를 버려두고 부인하며 배신했습니다. 그러나 그 덧없는 죽음이 온전한 노동이었고, 하나님은 바로 그 덧없는 죽음을 통해서 온전한 결과를 내놓으셨습니다. 없음에서 있음으로, 즉 새로운 창조가 벌어지는 지점은, 예수 자신의 멸망을 통해서였습니다. 

  마리아가 어디까지 내다보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죽음을 회피하려는 제자들과는 명백히 다른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녀는 예수의 죽음을 피하기는 커녕, 나름의 방식으로 준비합니다. 그녀는 자신의 재산을 멸망시킵니다. 그 형식은 분명 제자들이 말한 것과 같이 '뒤돌아보지 않는 낭비'입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준비가 곧 온전한 노동이라는 사실이 드러날 것이고, 그 "예수의 멸망"이라는 좋은 소식(이 또한 역설입니다)이 전파되는 모든 곳에서, 자신의 재산을 멸망시킨 그녀 역시 기억될 것입니다.

  타인에게 꽂혀서 자신의 뿌리가 뽑히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여자는 가산을 탕진했고, 예수는 멸망당했습니다. 이때 "무엇을 위해서"라 묻는다면 그 이유는 자신에게서 발견될 수 없습니다. 나 아닌 '이웃', 나 아닌 '하나님'에 대한 사랑, 곧 사랑은 타자를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때 우리가 한 번 더 생각해봐야 하는 것은, 타인을 위해 멸망당하려는 예수는 사랑의 위대한 걸음을 걷는 자기 자신을 숭고하다고 생각했을지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기 대단히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사랑하고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해 숭고함을 느끼는 것은, 스스로 만들어낸 상상속의 나에 대한 경외, 곧 나르시시즘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곧 "숭고한 나"는 내가 만든 우상이지 사랑일 수 없습니다. 사랑은 자신을 숭고하게 만들기는 커녕, 자신을 잊게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멸망(부인)으로 향하는 십자가 처형은 그야말로 아버지에 대한 신실함으로 수행하는 "온전한 노동"입니다. 

요한복음 5:17, 개역한글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그리고 마태는 여인의 온전한 노동과 대비시켜, 가룟 유다의 노동을 이야기합니다.

  그때 그 열 둘 중에 하나가 떠났는데, 

"이스카리옷의 유다"라 이야기되는 그가 대제사장들을 향해 말했다.


  "당신들은 나에게 무엇을 주길 원합니까?

  그리고 바로 내가 당신들에게 그이를 넘길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은전 30개를 그에게 세웠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는 좋은 때(ευκαιρος)를 추구했다

이는 그가 그이를 팔아넘기기 위함이다.


  마태가 이 대목에서 "열 둘"을 언급하는 것은 주목할 만 합니다. 이 "열 둘"은 예수께서 새롭게 모으신 열 둘, 회복되는 새로운 이스라엘의 열 둘이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는 새 언약의 중보자로서 자신의 백성을 새롭게 구성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에 충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이 새로운 열 둘에 '그리욧 지역 출신의 유다'[각주:1] 또한 이 위대한 열 둘의 한 지파를 맡고 있습니다. 즉 그는 '온전함(12)'의 일부입니다. 그러나 그는 새로운 이스라엘의 자리를 스스로 박차고 떠났습니다.

  마리아의 "온전한 노동" 이후 유다의 거래가 묘사되는 것은, 가룟 유다가 예수의 죽음이 확실시되자 예수에 대한 모든 희망을 버리기로 작정했음을 보여주는 구성이라 생각합니다. 멸망을 관통하지 않는 구원은 없습니다. 구원은 곧 아담성의 멸망입니다. 멸망당한 아담성의 자리에서 메시아성이 신에 의해 일으켜지는 것이 부활이요, 오는시대의 삶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아담성의 멸망/메시아성의 부활을 살아가도록 부름받았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의 노동은 죽음을 회피합니다. 자신은 아무 것도 잃고자 하지 않는 노동입니다. 타인이 없는 자신만을 위한 노동입니다.

  은화 30개는 그 가치가 120데나리온과 같습니다. 즉 마리아가 깨뜨린 향유의 1/3 정도 되는 금액인데, 이는 노예 한 명의 매매 가격이기도 했습니다. 이 내용은 출애굽기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출애굽기 21:32, 새번역 
소가 남종이나 여종을 받아 죽게 하였으면, 소 임자는 그 종의 주인에게 은 삼십 세겔을 주고, 그 소는 돌로 쳐서 죽여야 한다.

  노예의 죽음에 대한 보상 금액이 은화 30개였습니다. 즉 가룟 유다가 받은 금액은 예수를 노예 취급한 것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또한 스가랴서에서도 은화 30개는 부정적인 늬앙스로 언급됩니다.


스가랴 11:9~12, 새번역 
그런 다음에 나는 양 떼에게 말하였다.

  "나는 더 이상, 너희를 돌보는 목자 노릇을 하지 않겠다.
  죽을 놈은 죽고, 망할 놈은 망하여라. 그러고도 남는 것들은 서로 잡아먹어라."


  그런 다음에 나는 '은총'이라고 부르는 지팡이를 가져다가 둘로 꺾어서,
내가 모든 민족과 맺은 언약이 취소되게 하였다.

그 언약은 바로 그 날로 취소되었다.
양 떼 가운데서 괴로움을 당하던 양들은 나의 행동을 보고서,
주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가 좋다고 생각하면,
  내가 받을 품삯을 내게 주고,
  줄 생각이 없으면, 그만두어라."

  그랬더니 그들은 내 품삯으로 은 삼십 개를 주었다.


  목자와 양 관계가 파기될 때 등장하는 금액도 은화 30개입니다. 


2.


  그런데 그 누룩없음들의 첫 (날)에 제자들이 그 예수 앞으로 와서 말했다.


  "당신은 어디에서 당신께 그 유월절 음식 먹는 것을 우리가 준비해드리길 원하십니까?"


  그런데 그이가 말하셨다. 


  "너희들이 도시 안에 (있는) 어떤 하나를 향해 떠나라,

  그리고 그에게 너희들이 말하라, 


    '선생께서 말씀하시길, '나의 때가 가깝고, 너를 향해 

    내가 나의 제자들과 함께 그 유월절 음식을 한다'"


  그리고 그 제자들이 행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분부하신대로,

그리고 그들이 그 유월절 음식을 준비했다.


  제가 "그 누룩없음들"이라고 번역한 것은 '무교절'입니다. 무교절은 누룩이 들어있지 않은 빵을 먹는 7일의 기간으로서 출애굽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리고 이 무교절 7일 중 첫째 날이 유월절입니다. 이 
유월절 식사는 누룩없는 빵, 불에 구운 양고기, 쓴 나물을 먹으며 이집트에서 출애굽했던 것을 기념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날은 금요일이고, 이 날은 예수께서 돌아가시기 하루 전날인 목요일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지역에서의 예수의 높은 인기를 반영하듯, 예수께서 막무가내로 보낸 제자들을 환대해주는 이웃을 쉽게 만날 수 있었습니다. 환대하는 이웃 없이는 최후의 만찬을 준비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 유월절 식사 준비의 정당성에 대해서 예수께서는 "나의 때가 가깝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나의 때"란 언제일까요?

  그런데 저녁이 되었을 때 그이는 그 열 두 제자들과 함께 기대어 누우셨다.

그리고 그들이 먹고 있을 때 그이가 말하셨다.


  "아멘 내가 너희들에게 말한다, 

  너희들로부터 하나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그들은 극도로 슬퍼하며 각각 하나씩 그이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결코 아니지요, 주여?"


  그런데 그이가 대답하며 말하셨다.


  "나와 함께 저 그릇에 그 손을 넣는 자, 그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한 편으로 인자가 그에 관해 기록된대로 떠난다.

  다른 한 편으로 자신을 통해서 인자가 팔아넘기는 바로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다).

  그에게는 온전했을 것이다, 만일 바로 그 사람이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런데 그이를 팔아넘긴 유다가 대답하며 말했다. 


  "나는 결코 아니지요, 랍비여?"


  그이가 그에게 말했다. 


  "네가 말했다."


  이제 목요일 저녁이 되었고,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식사를 나누셨습니다. 이때 예수는 "너희들로부터 하나가 나를 팔아 넘길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다들 한 명씩 자신은 아닐 것이라고 물을 때, 예수는 가룟 유다가 바로 그 사람이라고 명시하지 않습니다. 예수는 자신과 함께 그릇을 쓴 사람이 그 사람이라고 말씀하시지만, 이 정보는 범인을 잡는 단서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모두 그 그릇에 손을 넣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자리에 있는 범인의 마음만이 찔릴만한 진술입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인자가 그에 관해 기록된대로 떠난다"입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다시 다니엘 7장의 맥락과 승천 사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가룟 유다에 대해서는, 마태복음 18:7이 떠오릅니다.

마태복음 18:7, 개인번역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들로부터 코스모스가 망했구나! 

즉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통해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오게 하는 사람은 망했구나!


  가룟 유다가 묻습니다. "나는 결코 아니지요, 랍비여?" 그러나 자신이 아니라면, 그렇게 행하지 않으면 그만입니다. 누군가의 확인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자신이 말한대로 실천한다면, 자신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자신이 이미 결정한 것을 묻습니다. 그리고 유다의 속셈은 예수를 부르는 호칭에서부터 이미 조금씩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3.


  그런데 그들이 먹고 있을 때 예수께서 빵을 취하고 좋게 말하시며(복 비시며) (그 빵을) 부수셨고 그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하셨다.


  "너희들은 받아라, 너희들은 먹어라. 이것이 나의 이 몸이다."


  예수께서 무수신 빵은 누룩이 들어가있지 않은 무교병이었을 것이므로, 그 빵을 "찢는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입니다. 오병이어 이후 예수의 집 앞에서 장사진을 치고 있었던 사람들은 "인자의 살을 먹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서, 모두 예수를 떠나갔습니다.

요한복음 6:53, 개역한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즉 이 빵의 찢김은 인자의 찢김이고, 예수는 자신의 찢긴 살점을 제자들에게 건내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식사가 유월절 식사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즉 이 식사는 이집트에서의 마지막 식사고, 이 식사를 급히 마친 사람들이 어둠을 지나 이집트를 빠져나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는 자신을 유월절에 죽어서 사람들에게 먹히는 어린 양이라고 이해하고 있음에 분명합니다. 그 어린 양의 날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 사람들이 이집트의 어둠을 빠져나가는 날입니다.

골로새서 1:13,14, 개인번역

즉 아빠는 우리를 어둠의 권위로부터 구출하셨고,

그의 사랑의 아들의 왕권으로 옮기셨습니다.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풀려남을 얻어요, 비뚤어짐으로부터의 자유를!


  그리고 잔을 취하여 잘 감사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너희들 모두는 이것으로부터 마셔라.

  왜냐하면 이것이 계약에 속한 나의 피이기 때문이다.

  (이 피는) 많은 이들에 관하여 비뚤어짐들을 보내버리기 위해 흘리는 것이다.


  유월절 식사에서 잔은 1) 축사, 2) 식사 전, 3) 식사 후 축복, 4) 찬양과 함께 드는 잔까지 총 네 번의 잔을 들게 됩니다. 본문의 잔은 세 번째 잔입니다. "언약에 속한 나의 피"는 곧 자신이 유월절 어린양으로서 피흘려 죽게 될 것이라는 암시이며, 그이는 바로 이 피흘림을 통해 자신의 죽음을 통해 많은 이들이 비뚤어짐(아담성)을 보내버리게/용서를 위해(εἰς ἄφεσιν) 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것은 "계약의 피"이기 때문에 공식 문서에 의해 보증되는 내용을 필요로 합니다.


예레미야 31:30~34, 새번역

...오직 각자가 자기의 죄악 때문에 죽을 것이다. 신포도를 먹는 그 사람의 이만 실 것이다."


  "그 날이 오면,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유다 가문에 새 언약을 세우겠다. 나 주의 말이다. 이것은 내가 그들의 조상의 손을 붙잡고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오던 때에 세운 언약과는 다른 것이다.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은 나의 언약을 깨뜨려 버렸다. 나 주의 말이다. 


  그러나 그 날 이후에,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언약을 세울 것이니, 나는 나의 율법을 그들의 가슴 속에 넣어 주며, 그들의 마음 판에 새겨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그 때에는 이웃이나 동포끼리 서로 '너는 주님을 알아라' 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은 작은 사람으로부터 큰 사람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모두 나를 알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다시는 기억하지 않겠다. 나 주의 말이다."

  예레미야 본문을 통해 우리가 확인해야 하는 것은 1) 새 언약의 시점과 2) 새 언약을 체결한 사람들의 특징인 '법의 내면화'입니다. 예수는 유월적 식사 자리에서 자신의 죽음을 말씀하셨고, 그 예수의 죽음이야 말로 예레미야가 언급한 "그 날이 오면" 입니다. 예수는 자신의 죽음이 곧 피를 흘려 (옛 언약과는 다른) 새 언약을 체결하는 것임을 천명하셨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예레미야가 예언한 '가슴 속에 율법을 가진, 마음 판에 법이 새겨진 사람들'을 성령으로 설명합니다.

고린도후서 3:5,6, 개인번역

우리가 우리자신들로부터 우리 자신들이 누구인지 산정되기에 충분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여러분의 충분함은 하나님께로부터 있습니다, 그는 우리를 새 언약의 섬김이들로서 문자로가 아니라 숨결로 충분하게 하십니다. 

  즉 메시아의 십자가 처형 이후로 성령을 통해 법이 내면화된 사람들이 탄생한다는 것이고, 바로 이 사람들이 본문의 "비뚤어짐을 보내버리는 많은 이들"이며 곧 하나님과 새로이 계약한 새 이스라엘입니다. 이 내용을 새 계약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에스겔이 보장합니다.

에스겔 11:19,20, 개역한글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새 마음을 주고, 새로운 영을 그들 속에 넣어 주겠다. 내가 그들의 몸에서 돌같이 돌 마음을 없애고,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주겠다. 그래서 그들은 나의 율례대로 생활하고, 나의 규례를 지키고 그대로 실천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그런데 내가 너희들에게 말한다, 

  결코 나는 지금부터 이 포도로부터 난 것으로부터는 마시지 않겠다,

  나의 그 아빠의 통치 안에서 새로운 것으로 너희들과 함께 그것을 마시는 바로 그날 까지는."


  앞에서 유월절 식사 자리에서는 네 번의 잔을 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께서 "마시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잔은, "할렐" 찬양과 함께 마시는 네 번째 잔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이후 포도주를 드시는 장면은 그리 멀지 않습니다. 바로 다음 날인 금요일에 예수는 포도주를 드셨습니다. 물론 제자들이 함께 마신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요한복음 19:28~30, 새번역
그 뒤에 예수께서는 모든 일이 이루어졌음을 아시고,
성경 말씀을 이루시려고 "목마르다" 하고 말씀하셨다.
거기에 신 포도주가 가득 담긴 그릇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해면을 그 신 포도주에 듬뿍 적셔서, 
우슬초 대에다가 꿰어 예수의 입에 갖다 대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시고서,
"다 이루었다" 하고 말씀하신 뒤에,
머리를 떨어뜨리시고 숨을 거두셨다.

  그리고 이 신 포도주를 먹는 장면은, 우리가 앞에서 읽었던 예레미야의 내용과 겹치지 않습니까?

예레미야 31:30, 개역한글
신 포도를 먹는 자마다 그 이가 심 같이 각기 자기 죄악으로만 죽으리라

  예수는 자기 죄악 없이, 신 포도를 마시고 죽으셨습니다. 구약의 예언들이 뒤틀리고, 예수는 기이한 방식으로 그 예언을 성취하셨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그 기이함의 절정입니다. 죄 없는 자가 죄를 뒤집어쓰고 죽습니다. 이로써 율법은 그 기록대로 이뤄지고, 율법을 준수하는 새로운 길이 열립니다. 그리고 이 십자가 사건을 기념하는 것이 성찬입니다. 에클레시아가 찢겨진 예수의 살점과 새로운 계약의 피를 마실 때, 그것은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 자신이 출애굽했음을 확인하는 것이자, 그때의 잔은 "다 이루신 그 일"에 대한 "찬양"과 함께 마시는 네 번째 잔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찬양을 불렀고 올리브들의 그 산 속으로 나갔다.

  H. Ruche라는 독일 신학자는 이때의 찬양이 할렐 찬양인 시편 113~118편이나,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리로다"라고 찬양하는 시편 136편일 것이라 말합니다.

그때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 모두가 내 안에서 걸려넘어지게 될 것이다, 바로 이 밤에, 

  왜냐하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가 그 목자를 칠 것이다, 그리고 그 목자의 그 양들이 흩뿌려지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 나를 일으키심' 이후에 나는 너희들을 그 갈릴리 속으로 앞에서 이끌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가 대답하며 그이에게 말했다.


  "만일 모두가 당신 안에서 걸려 넘어지게 된다면, 

  나는 결코 걸려 넘어지게 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했다.


  "아멘 내가 너에게 말한다, 

  바로 이 밤에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할 것이다."


  베드로가 그이에게 말했다.   


  "그리고 만일 내가 당신과 함께 죽어야만 한다면, 

  나는 결코 당신을 부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같이 모든 제자들도 말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너희들 모두가" 자신 안에서 걸려넘어지게 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것도 바로 이 밤에. 이 밤은 겟세마네의 밤, 마침내 가룟 유다가 예수를 팔아 넘기는 밤입니다. 그리고 이때 "걸려 넘어지다"는 우리가 앞에서 확인했던 '스칸달론(σκανδαλον)'입니다. 가룟 유다 뿐만 아니라 모든 제자들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그 양들의 목자는 스가랴 13:7처럼 될 것입니다.

스가랴 13:7, 새번역
"칼아, 깨어 일어나서, 내 목자를 쳐라.
나와 사이가 가까운 그 사람을 쳐라.
나 만군의 주가 하는 말이다.
목자를 쳐라. 그러면 양 떼가 흩어질 것이다.
나 또한 그 어린 것들을 칠 것이다.

  마태는 '목자를 치는 사건'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고, 그 사건 이후 제자들의 흩어짐이 곧 '양들의 흩뿌려짐'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 뒤에 예수는 일으켜질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일으켜진 예수는 흩어졌던 제자들을 다시 갈릴리로 이끄실 것입니다. 

  이상 예수의 예언에 대한 베드로의 반응은 확고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걸려 넘어져도, 자신은 넘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확고한 의지 표명입니다. 그러나 그런 베드로 마저도 걸려 넘어질 것입니다. 베드로는 재차 그렇지 않을 것이라 확언하지만, 그리고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로 말하고 있지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1. 아모스 2:2 내가 모압에 불을 보내리니 "그리욧" 궁궐들을 사르리라 모압이 요란함과 외침과 나팔 소리 중에서 죽을 것이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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