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8.28. 00:17 번역함



디모데전서 4:5b~10, 개인번역

즉 모든 하나님의 피조물은 온전해

그리고 어떤 것도 거절된 것일 수 없어

'잘고맙'과 함께 취해진 것은,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만남(
ἔντευξις)을 통하여 거룩해지기 때문이야.


이것들을 그 형제들 아래에 두는 너는

너는 메시아 예수의 온전한 섬김이가 될 거야,

(지금까지 네가 따라왔던) 온전한 가르침과
신실함의 이치(말씀)들로 자라게 되고 말이야.

그런데 어디서든 접할 수 있고 노파적인 이야기들을 사양해!

그리고 스스로 훈련해, 경건을 위하여.

왜냐하면 몸의 훈련은 조금을 위한 이익이지만,

경건(εὐσέβεια)은 모든 것을 위한 이익이기 때문이야,

(경건은) 지금과 곧 도래할 삶의 알림을 갖으니까.

말씀은 신실하고

모든 받아들임의 자격있다.

즉 이것(neut.) 속으로 우리는 지쳐있고 투쟁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시는 하나님께 소망했기 때문이야,

(그 분은 모든 사람들, 특별히 믿는 이들의 구원자셔).




  오늘은, <디모데전서>를 살펴보겠습니다. 뒤에 '전서'가 있는 것을 보고, 지난 주 배웠던 것을 기억하는 친구들은 아 '먼저 보낸 편지구나'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그럼 먼저 <디모데전서>라는 편지의 보낸 사람과 받는 사람을 알아봅시다. 맨 앞을 보면 알 수 있겠지요?


디모데전서 1:1,2a 새번역 

우리의 구주이신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된 나 바울이,

믿음 안에서 나의 참 아들이 된 디모데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보낸 사람은 바울이고, 받는 사람은 디모데입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믿음 안에서 나의 참 아들"이라 부릅니다. 바울이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참 가족으로 받아들이라고 했듯이, 바울은 디모데라는 사람을 믿음 안에서 자신의 아들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이 디모데는 에클레시아를 맡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목사이자 자신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두 통의 편지를 보냈고, 이 편지들이 나중에 성경이 된 것이 <디모데전서>와 <디모데후서>입니다. 


  그 편지의 내용 중 일부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디모데전서 4:4~10입니다. 먼저 이 구절을 읽어봅시다. 

디모데전서 4:4

즉 모든 하나님의 피조물은 온전하며, 

'잘고맙'과 함께 취해진 것은.

어떤 것도 거절된 것일 수 없어,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은 온전합니다. 이때 '온전하다'는 말은 질서잡혔고 아름답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온전합니다. 하나님의 질서에 따라 만들어졌고, 또 아름답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이 그러합니다. 어떤 것도 없어야 할 것이 없습니다. 어떤 것도 거절된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온전한데, 문제는 우리가 그 만물을 "잘고맙"과 함께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때 "잘고맙"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을 대하는 에클레시아의 자세입니다. 온전한 것을 마주 하기에 고마운 것입니다. 그저 고맙기만 하지 않습니다. 이 고마움의 표현을 잘 하는 것이 "잘고맙"입니다. 표현하지 않는 고마움이란, 우리의 관계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또 나와 너 사이에 늘 "잘고맙"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온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혹시 우리가 "잘고맙"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있을까요? 당시 에클레시아들은 다른 신들의 제사 때 사용된 고기를 먹어야되는지 먹지 말아야되는지의 논쟁으로 뜨거웠습니다. 그리고 당시 시장에 나오는 고기들은 대부분 우상의 제단에 드려졌던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그 고기를 먹어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해줍니다.


디모데전서 4:5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만남을 통하여 

  거룩해지기 때문이야.


  거룩하지 않다고 버릴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룩하게 만들면 되니까요. 때끼고 더럽고 거룩하지 않은 것을 거룩하게 만드는 수세미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과 만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지으신 모든 것이 온전하다는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그리고 에클레시아는 그 고기를 하나님과 만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에클레시아가 그 고기를 잘고맙으로 받고, 기도하면 그 고기는 거룩합니다.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고기만 그렇지 않습니다. 에클레시아는 파괴가 아니라 재활용하는 사람들입니다. 심지어 우상을 만들었던 금붙이들도 상관없습니다. 이집트에서 우상숭배에 사용하던 금붙이들을 모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성막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거룩은 파괴가 아니라 재활용입니다. 버리는 게 아니라,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4:6

이것들을 그 형제들 아래에 두는 너는

너는 메시아 예수의 온전한 섬김이가 될 거야,

(지금까지 네가 따라왔던) 온전한 가르침과 

신실함의 이치(말씀)들로 자라게 되고 말이야.


  그리고 디모데에게, 바울은 다른 형제들에게 이 내용들을 잘 가르치라고, 그런 사람이 메시아 예수의 "온전한" 섬김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온전한"이라는 말은 다시 한 번 반복됩니다. 잘 가르치는 일이야 말로 "온전한" 가르침과 신실함의 말씀으로 자라나는 일입니다. 우리가 자라고 있다면, 우리는 잘 가르치게 될 것입니다. 온전한 섬김이로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디모데에게 두 가지를 강력하게 명령했습니다. 하나는 하지 말 것, 다른 하나는 꼭 할 것!


디모데전서 4:7

그런데 어디서든 접할 수 있고, 

늙은 할머니들이 하는 이야기들을 사양해!

그리고 경건을 위하여 스스로 훈련해!


  먼저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어디서나 접할 수 있고, 또 늙은 할머니들이 하는 이야기를 거절하라는 것입니다. 앞에서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은 거절할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유독 이것만큼은 거절해야 하는데, 바로 "이야기"입니다. 사람이 만든 이 이야기는, 하나님이 만드신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리고 바울과 디모데가 살던 당시, 늙은 할머니들이 많이 하는 이야기는 바로 그리스 로마 신화였습니다. 하나님이 만들지 않고 사람이 만들어낸 이 이야기가, 오히려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야기를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망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해야 할 것은, 경건을 위한 훈련입니다. 이때 경건은 종교생활을 말하는 것이아닙니다. 일상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곧 경건입니다. 이러한 경건은 자연스럽게 삶에 입혀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훈련이 필요합니다.


디모데전서 4:8

왜냐하면 몸의 훈련은 조금을 위한 이익이지만,

경건(εὐσέβεια)은 모든 것을 위한 이익이기 때문이야,

(경건은) 지금과 곧 도래할 삶의 알림을 갖으니까.


  몸을 훈련하는 것도 좋습니다. 저도 건강을 위해서 매일 운동합니다. 그런데 이 일상을 하나님과 동행하는 훈련은 큰 이익이 있습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 때문에, 다른 사람이 오는시대가 도래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몸의 훈련이 개인을 위한 이익이 있다면, 경건은 나를 보는 많은 사람들을 위한 이익입니다. 공익적인 일입니다. 그런데 훈련이란 곧 반복입니다. 반복은 지루합니다. 그러나 그 반복의 지루함 속에서 새로움을 낳는 것이 또한 훈련입니다. 그래서 훈련은 처음에는 재미없지만, 이 새로움을 낳고나서야 진정한 재미를 맛보게 됩니다. 이 반복을 거치지 않고, 지루함을 뛰어넘지 않고 할 수 있는 훈련은 이 온전한 하나님의 창조세계 위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지금까지 했던 자신의 말들에 대해서 자신의 간절하면서도 확신에 찬 
마음을 담아 이렇게 기록합니다.


디모데전서 4:9

이 말씀은 신실하고

모든 받아들임의 자격있다.


  바울은 단순히 '이렇게 살면 행복할거야', '이렇게 사는 편이 좋은거야'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디모데전서 4:10

즉 이것(neut.) 속으로 우리는 지쳐있고 투쟁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시는 하나님께 소망했기 때문이야,

(그 분은 모든 사람들, 특별히 믿는 이들의 구원자셔).


  바울은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온전히 여기며, 더러운 것들을 끊임없이 재활용하며, 경건의 훈련 속에서 오는시대의 알림판으로 사는 일에 지금 지쳐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더 싸우려고 합니다. 즉 바울은 이러한 삶을 살고자 버티고 있습니다. 그의 버팀은 살아계신 하나님께 붙박아놓은 소망입니다. 바울은 그 하나님이 우리만의 구원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분은 모든 사람들의 구원자"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구원받을 모든 사람들 중 특별한 사람이라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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